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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변 '임해진'과 '노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개비릿길'
낙동강변 '임해진'과 '노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개비릿길' ⓒ 황원판
'개비릿길'이란 개가 다녔을 좁고 험준한 절벽위의 길을 말한다. '비리'는 '벼리' '절벽'을 말하는 이곳 지방말로 '개가 절벽 위를 다니며 이 길을 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위험해서 사람이 다닐 엄두도 안 나는 험한 절벽 위로 개 두 마리가 서로 오가면서 길이 나기 시작하여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되고 10여 년 전에는 자전거와 리어카·경운기도 오갈 수 있는 농로로 확장되고 3년 전에는 승용차가 달릴 수 있는 포장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개비릿길'을 지나 길가에 있는 '개로비'(開路碑)
'개비릿길'을 지나 길가에 있는 '개로비'(開路碑) ⓒ 황원판
이 가파른 절벽 위로 난 길을 지나면 조선 때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개비'를 볼 수 있다. '견비'(犬碑)라고도 하고 '개로비'(開路碑)라고도 부른다.

한 평 남짓한 무덤 앞에 선 비석이 세월을 이기지 못해 심하게 상했지만 아직 비석의 형체만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비석을 보며 "왜 개를 위해 비석까지 세웠을까?" 궁금하여 비문을 눈여겨보지만 글을 전혀 알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지난 1월 5일 비문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다행히 자전거를 타고 이 비석 앞을 지나시는 주영모 할아버지(80·창녕군 남지읍 노리)를 만나 비석의 유래를 물어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생생히 비석에 얽힌 사연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셨다.

"옛날에 임해진과 노리 마을에 성(性)이 다른 두 마리 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마리 개가 서로 잊지 못해 매일 (죽음을 무릎쓰고) 험준한 '개비릿길' 절벽 위를 지나 오가면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보니 사람이 다닐 수 없던 험한 절벽위로 조그만 길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노리와 임해진 사이에 길이 없어 고생이 매우 컸지만 개에 의해 산길이 난 이후에는 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들은 뜻 없이 한 일이지만 그 길로 인해 생활이 무척 편리해진 노리 사람들은 개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개비의 유래는 '창녕군지'나 '창녕군지명사'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한다.

'개로비'에 얽힌 사연을 생생히 전해주시는 할아버지
'개로비'에 얽힌 사연을 생생히 전해주시는 할아버지 ⓒ 황원판
사실 우리 나라에는 여러 가지 의로운 개 이야기인 '의구전설'(義狗傳說)이 각 지방에 전해지고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獒樹里)에 세워진 '의견비'와 같이 개가 산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이야기가 하동·전주·구미·청주 등지에서 전해지고 있으며 도둑에게 피살된 주인의 원수를 갚게 한 개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개가 길을 처음 열어 주민을 '자자손손' 편리하게 해주고 그 공로를 기려 '개로비'라는 비석을 세운 유례는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오랜 세월 탓에 비석은 형체만 남았지만 노리(魯理)와 인근 지역 주민들 마음 속에는 아직도 또렷이 '고마움을 기리는 마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길을 오가며 '개로비'보고 개의 고마움 못잊는 노리(魯理) 사람들
길을 오가며 '개로비'보고 개의 고마움 못잊는 노리(魯理) 사람들 ⓒ 황원판
약 1주일간 '비석'에 새긴 그 비문을 찾아 헤매어도 구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에는 생생히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고 큰 위안으로 삼았다. 그들의 마음에는 고마움을 새긴 비문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비석을 보고 '감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흔히 요즘을 '감사를 잊은 시대'라 비판하기도 한다. 개에 감사한 우리 조상이 한편으로 우스울지 모르지만 사실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나 세운 공덕비를 '개'에게도 세웠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인간·동물·자연을 넘나드는 넉넉한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가졌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개로비' 보며 개의 고마움 못잊는 노리(魯理)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감사할 대상이 무척 많음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길을 열어준 존재가 얼마나 많은가? 어느 누구에게나 하찮은 작은 일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는 '훈훈한'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태풍 '매미' 피해를 입은 '개로비'
태풍 '매미' 피해를 입은 '개로비' ⓒ 황원판
아울러 이런 조상들의 '감사와 겸손'의 정신세계를 계승하기 위해서 태풍 '매미'로 훼손된 것 같은 '개로비' 주변도 좀 빨리 복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전북 오수리 의견비처럼 '지방민속자료'로 지정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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