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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아산 마당바위 위에서 바라본 화순군 북면의 일부 저 멀리 담양과 곡성군도 조금 보입니다.
ⓒ 김규환


아! 백아산

전라남도 정중앙에 위치한 화순군. 화순군 북면이라는 곳은 그래도 지금은 살 만한 곳이다. 온천에 휴양림마저 들어섰다. 사람 사는 냄새가 조금 나니 말이다. 하지만 50여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그곳은 빨치산과 국군의 처절한 다툼이 있었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마당바위' 반대편이자 칡넝쿨이 많던 '갈경이' 노치마을과 어렴풋이 '마당바위'가 보이는 '골안7동'으로 불리는 방리, 송단리 일대는 같은 면(面)에 살았던 사람들도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못 나오는 곳으로 여기고 접근을 꺼렸다.

백아산을 끼고 정반대에 있던 터라 닮은 데가 많았으니 우리 마을 이야기나 매 한가지일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에도 아침마다 통학을 할 수 없던 그곳 몇 마을 출신들은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그런 곳에 살았으니 일 년 중 아이들도 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도회지로 나와 동년배나 10여 년 선배에게 물어 보면 물고기나 잡고 자치기나 하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물론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도 한다.

▲ 복조리 만드느라 졸았던 기억이 또렷하네요. 손도 무지 부르텄습니다.
ⓒ 김규환


백아산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 그리고 어린이들

일상의 생활을 간략히 짚어보면 날이 풀리기 전에도 이미 보리밭 밟기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퇴비 짐 지고 밭두렁을 쏘다녔다. 못자리 만들기를 어른들과 같이 했고 1모작 모내기와 보리 베기를 하고 2모작 모내기를 함께 한다.

일단 여름 농한기가 되면 꼴망태나 바지게를 지고 나가서 풀을 베어오는 도중 멱이나 한번 감을 뿐이었던 아이들은 가을 무렵에는 벼 베느라 학교를 거르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벼를 베고는 벼를 탈곡하는데 동참하고 일이 끝났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이젠 보리와 밀을 가느라 흙덩이를 쇠스랑이나 괭이질을 해서 깨는 일을 며칠이고 해댄다. 건조한 가을 바람에 흙먼지를 얼마나 마셔댔는지 모른다. 일반적인 남부 지역의 일년 농사와 생활이 그랬다.

하지만 여기에 더 추가되는 일이 있었는데 하지 무렵에는 대마를 베어 삶아서 겨릅대 벗기기 작업을 하고 칡넝쿨을 식구들마다 나가 떠와서는 삶아서 벗겼다. 깊숙한 산으로 가서 조릿대(산죽의 일종)를 베어 와서 복조리 만드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흰 눈이 산야를 뒤덮은 겨울 밤이면 얼마나 많은 조리를 절었던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곳은 해발 300m 대에 집이 있었다. 걸핏하면 10월 이후론 810m였던 백아산에 눈이 올 정도로 추웠으므로 겨우내 나무하는 게 일이었다.

▲ 이런 낫으로 나무를 벱니다.
ⓒ 김규환


땔감 마련하느라 겨울을 보내고

자, 그럼 오늘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나무하러 떠나 보자. 무릇 일에 있어 꽤 많은 부분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하자. 대개 예닐곱 명에서 열 명이나 되는 한 식구가 함께 가서 작은 골짜기를 아작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나무 젓가락 만한 물거리(생나무를 일컬음)를 벨 뿐이다.

간혹 소나무에 올라가 가지가 말라비틀어진 삭정이를 따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운수 좋은 날이나 유과(그 지역은 한과(韓菓)를 주로 유과라 불렀다)를 만드는 등 특별히 연기가 나지 않을 땔감을 마련해야 할 때 싸리나무와 함께 일년 한두 번이나 베어 오는 것이다.

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인 '솔가리'를 긁어 수수깡이나 나무 줄기를 모아 집채 만한 짐을 지고 내려오기도 하는데 내가 살았던 지역은 그마저도 없었다. 까닭은 백아산 지역이 빨치산의 소굴인지라 이승만 정권 때 한번, 박정희 정권 초기에 두 번 일대를 소개(疏開)할 명목으로 정부에서 일부러 불을 놓았기 때문에 큰 나무가 있을 턱이 없었다. 민둥산이 즐비했고 커봐야 굵기가 낫자루 만한 나무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우린 왕복 십리 이내에서는 벨 나무가 없어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심지어 외갓집이 있던 해발 600m가 넘는 차일봉 일대를 넘어 곡성군 삼기면을 수도 없이 넘었다. 왕복 20리가 넘는 군(郡) 경계를 넘으면 그나마 땔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어찌나 많이들 나무를 했던지 친구 육남이와 영희네는 온 식구가 달려들어 겨울이면 행랑채만한 나무 더미를 열 동(棟)이나 만들기도 했다. 육남이네는 남자 아이만 7명이었고 영희네는 부지런하기로 소문났었다.

밥 먹고 하는 일이 나무하는 것인데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는 성인 한사람은 두 짐인 여덟 다발을 베어 한 짐은 점심 때 지고 내려오고 한 짐은 그곳에 그냥 두고 내려온다. 점심을 먹고 산으로 다시 기어올라가서 오후에 또 한 짐을 일찌감치 해서 지고 내려오고 나머지 한 짐은 해질녘 지고 내려오는 패턴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식구대로 백철(白鐵) 솥 단지 하나에 김장 김치 서너 포기와 쌀 몇 줌을 씻어가서 멸치나 돼지고기 반 근 잘게 썰어 넣고 김치죽을 끓여 먹으면서 온 종일 산에 사는 일도 잦았다. 다분히 오르락 내리락하는 시간을 절약하고자 한 것이다. 밥을 끓이면서 작은 계곡을 이 잡듯이 뒤져 가재 몇 마리 집어넣으면 붉게 변해 식욕을 돋궜다.

▲ 그 시절엔 나무를 얼마나 많이 땠는지 온통 집안이 그을음 투성이었답니다. 눈물 깨나 흘렸었지요.
ⓒ 김규환


일곱 살 때 내 지게 지고 형들 따라 나선 길

그럼 본격적으로 나무를 해 보자. 어머니와 누나가 아침밥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와 우린 쇠죽을 쒀서 퍼 주고 밤새 꼬아둔 사내키(새끼줄의 사투리)를 넉넉히 챙겨 놓고 낫을 잘 들게 갈아 둔다. 산에 가면 칡넝쿨이 즐비하나 행여 칡이 없는 곳에서는 낭패를 보기 쉬우니 준비해 가는 게 좋다.

아침을 먹고 출발. 여섯 살 때 이미 지게 만들어 달라고 졸랐던 일곱 살 먹은 나도 따라 나섰다.

긍내기(극낙이라는 꽤 큰 골짜기)까지 가는 길은 소로굴 입구를 지나 비까리, 평까끔을 거쳐 아랫 동정지, 윗 동정지를 거쳐야만 한다. 긍내기 초입까지는 논과 밭이 있다. 내리막길이라곤 한군데도 없이 사람만 다닐 수 있는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겨울인데도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한 모금씩 들이키고는 좌측 차일봉이 있는 '큰애드골' 일대는 놔두고, 신비낭골과 귀목나무골, 물텅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응달쪽이라 사람들이 그래도 남겨둔 지역이 간혹 있다.

이곳까지도 토끼와 고라니 올무를 설치해 놓았다. 내려 올 걸 생각하여 한 쪽으로 치워놓았다. 벌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지 눈길은 파삭파삭 부서져 길이 나 있다. 주위 나무는 훤하게 뚫려 있다.

"큰 성, 다 벼가고(베어가고) 없는 갑네."
"뽕대기(꼭대기) 쪽으로 더 올라가면 있을 것이여…."
"언제 저 뽕대기까지 간단 말인가? 글다 힘 빠지면 오늘 일은 다 하는 것 아녀?"
"막내야, 째까 더 올라가 보잔께. 성이 봐 놨어야."
"알았어. 작은 성, 글고 여기 눈 묵어도 되제? 맛있겠다."
"묵어라."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한두 번 산길을 다닌 건 아니지만 지게를 지고 걸리적거리는 나무를 피해 가파른 산을 오르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야산에서 참꽃나무나 때죽나무, 썩어 가는 나무 밑둥이나 흔들어서 지고 내려왔던 예년의 길과는 판이한 여정이다.

20여 분쯤 더 오르자 삼사 일은 나무 찾아 헤맬 걱정 없이 장대처럼 쭉쭉 나긋나긋 빠져 베기에 좋고 베고 싶은 나무가 빼곡하다.

"아따 성아는 귀신인갑네. 어찌코롬(어떻게) 그렇게 잘 봐뒀당가?"
"재작년에 한번 와 봤어야."

그렇다. 작년에 벤 곳은 아무래도 아직 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지나쳤을 것이다.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두 해가 되는 올핸 필시 더 성장이 잘 되어 우릴 반길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수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감은 무섭다.

각자 벨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아버지는 복령 캐러 가셨고 어머니는 출타 중이라 두 살 짜리 연순이만 빼고 5남매가 함께 했다.

"큰 성, 엄니가 근디 여그 개호랑이 많이 나온다 글드만."
"성이 큰 작대기 하나 해놨응께 걱정 말고 해라."
"글도 난 성 옆에서 할 것이여."

▲ 저 안쪽이 긍내기라는 곳입니다. 80년대 초반 대형 저수지가 들어오고서는 그 속에 추억이 모두 잠기고 말았습니다.
ⓒ 김규환


아이들도 혼자서 나무 베어 묶고 짊어지고 산비탈을 내려온다

땀이 약간 식어서인지 첫 낫질이 쉽지 않았다. 왼손에 나무 두세 개 잡고 무쇠 낫으로 "쓱" "북" "척" 소리를 내며 베어간다. 베어서 한곳에 한 웅큼씩 가지런히 모아 깍지를 만들어 발로 밟아 준다.

그렇게 해서 서너 깍지 모이면 한 곳에 새끼줄을 나무 전체 길이 3등분하여 굵고 두꺼운 쪽 1/3 지점에 놓고 베어둔 나머지를 가져와 한 다발 양을 올린다. 그 다음 엉덩이를 밑둥지로 향하게 올라타서는 한 번 두 번 세 번 굴려서 압축한다.

양어깨 힘에 발, 엉덩이 힘을 주어 굴려대니 부피가 줄었다. 마지막으로 홀 메를 쳐서 단단하게 묶는다. 이러기를 서너 번은 해야 한다. 나는 그날 세 다발은 혼자서 거뜬히 해냈다.

"성, 힘들구만. 배고푸다."
"몇 다발 했냐?"
"석 다발."
"글면 얼렁 내려가자. 밥 묵고 와서 또 해야제. 근디 니가 이걸 다 지고 내려 갈라고?"
"그려, 나도 심(힘)이 장산께 충분하당께."

각자 나이와 힘에 상관없이 자신이 지고 갈 수 있는 양만큼 하는 게 원칙이다. 힘 있고 손놀림이 빠른 사람은 넉 다발이나 다섯 다발을 한다. 또한 다발 크기도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다만 열 두 살인 누나가 머리에 일 때는 쉽지 않았으므로 조금 도와주거나 막내인 내가 짐을 단단히 꾸리는 데 필요한 일을 거들어 준다.

5남매가 짐을 모두 꾸렸다.

▲ 소죽 끓이고 밥하고 국 끓이고 방마다 군불을 때던 그 때의 아랫목은 절절 끓었었지요. 하지만 귓대기는 시려웠습니다.
ⓒ 김규환


힘겨운 노동, 땔감 마련하여 내려오는 길

"막내야 준비 다 되었제?"
"잉."
"자, 민다잉?"
"그래, 들어줘 봐."

"뒤뚱뒤뚱"
"아~~~. 성~"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파른 산이다 보니 무거운 짐에다 밀어준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두 번을 나뭇짐을 진 채 돌았다.

"어디 다친 데 없냐?"
"잉."
"니기덜 먼저 내려가라. 글고 막내는 오늘은 한 다발 여기다 냉겨(남겨) 놓고 가자."
"갈 수 있당께…."
"오늘만 니가 양보해. 폴새(벌써) 다들 내려갔잖냐."
"잉."

다시 짐을 꾸려 두 다발만 졌는데도 내려오는 족족 양쪽의 수많은 가지가 괴롭혔다. 늘 왼쪽에 균형을 잡았던 나는 왼쪽으로 몸을 비틀어 왼발 한번 오른발 한번 차례대로 발걸음을 뗐다. 더딘 산길을 내려오느라 왼쪽 발 장딴지엔 쥐가 날 지경이었다. 작대기로 받혀 쉬기를 세 번을 하고서야 깔끄막(가파른 길)을 내려올 수 있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나 때문에 지체된 큰형도 넉 다발을 지고 뒤따라 내려오느라 힘겨운가 보다. 형이 먼저 냇가에 머리를 쳐박고 물을 양껏 마셔댄다. 나도 따라했다. 소가 빨아대듯 주변에 있는 맑은 물을 양껏 마셨다. 바닥엔 상수리나무, 자귀나무, 소태나무, 단풍나무 이파리가 얼음 사이사이로 깔려 있다. 어디 이보다 더 속시원하고 후련한 기분이 있을까?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앞선 형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길가 나무와 사위질빵 등 넝쿨에 걸려 기우뚱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뜀박질로 내려왔다. 집에 가까워져서야 평지가 나오고 괴롭히는 이 아무도 없는 신작로에 접어들고서야 걸음 속도를 늦췄다. 산길보다 평평한 길이 짐을 졌을 때는 탄력이 붙지 않아 더 힘들다.

▲ 맑은 물 한모금 먹고 오르락 내리락 했던 그 시내는 아직도 깨끗합니다.
ⓒ 김규환


달고 맛있는 점심 먹고 또 나무하러 간다

마당 한곳에 아무렇게나 짐을 부리고 정지로 달렸다.

"엄마, 밥…."
"그려 인자 왔냐. 우리 막둥이 애썼쟈?"
"배고픈 게 밥 줘."
"세수하고 와라. 근데 뭤이다냐? 얼굴이 왜 그려?"
"한 번 넘어졌어라우. 안 아픈 게 걱정 마쇼."

점심은 맛있었다. 청국장에 싱건지와 시어 가는 묵은 김치가 다였지만 나는 청국장 몇 숟가락 떠먹고 채 썬 싱건지와 김치 넣고 양푼에 비벼서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뜨려서 먹었다.

우린 그날 오후 또 나무하러 갔다. 그날부터 나무하는 데 동참했던 나는 중학교가 끝날 무렵까지 10년 가량을 겨울철이면 그렇게 보냈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잘한 아이여서 다른 아이들보다 덜했다. 차츰 다발 크기도 커졌고 한번에 해오는 양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게 원동력이 되어 아직도 난 어깨 힘만은 세다. 그래서인가 눈이 펑펑 내리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루 이틀 쯤 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몸만 힘들었을 뿐 힘들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그 시절은 그래도 아름답지 않은가.

▲ 이런 시골 집은 우풍(외풍)이라고 하는 바깥 찬바람이 문틈으로 기어들어와 서로를 보듬어 주도록 했던 모양입니다.
ⓒ 김규환

▲ 쌀 한 가마. 김치 두 독, 나무만 넉넉하면 잘 살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립습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지난 날 우린 그렇게 잘도 살았습니다. 부족한 것은 먹을 것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치원도 학원도 다니지 않아도 공부도 적당히들 잘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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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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