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책 <지구별 여행자>
ⓒ 김영사
시인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철학적 깊이와 대중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늘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그의 첫 번째 여행 산문집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또한 적당한 정도의 대중성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 많은 독자층을 확보해 왔다.

이 두 책들에 비해 2002년 새로 출간된 그의 인도 여행 산문집 <지구별 여행자>는 그다지 큰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아마도 그의 '비슷비슷한 글쓰기 스타일'에 싫증난 독자들이 그 뻔한 인도의 명상 이야기에 물려서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쁘고 정신 없는 현대 문명의 일상에 염증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지구별 여행자>는 또 다른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류시화의 명성에 어울리는 철학적 깊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읽기 쉬운 문체로 구성돼 좋은 책의 목록에 올려놓을 수 있을 듯 싶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여행 산문집은 그가 인도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얻은 체험과 교훈들을 쉽고 아름다운 문체로 전달한다.

옷을 벗고 수행 생활을 하는 사두, 몇 년째 침묵 수도를 하는 사두, 거지처럼 구걸을 하지만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두 등등 인도는 철학자와 수행자의 나라이다. 비록 그 겉모습은 초라하고 꾀죄죄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는 진정한 삶의 의미들이 담겨 있다.

자신을 이야기꾼이라고 자칭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돈을 내라는 한 노인에게 류시화씨는 궁금증 반, 의심 반으로 돈을 준다. 하지만 노인이 들려주는 얘기들은 모두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들이다.

화가 난 시인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소리를 지르자, 노인은 잊을 수 없는 교훈적인 말을 남긴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돈 몇 푼을 내고선 내가 하려는 이야기마다 가로막고 소리를 질렀소. 그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어떤 결론에 이르려고 하는 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이 계속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결국 당신이 내지르는 소리에 내 영혼이 놀라 쓰러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 또한 당신이 내지르는 소리에 결국은 쓰러지고 말 것이오."

'부정적인 언어 습관이나 행동으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황폐화 되고 있을까'를 돌아보게 하는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은 잘못된 언어와 행동으로 병들고 멍들어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도에 가면 누구나 철학자이고 누구나 수행자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지닌 사람들. 적선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당당하게 철학적 언어를 던지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인도라는 나라가 독특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식당 주인조차 명언을 좋아한다. 많은 여행자들이 모이는 한 인도 식당의 주인 고팔란씨는 여행자들에게 "인도에서는 인도 생각만 하고, 네팔에선 네팔 생각만 하라"고 말한다. 류시화씨는 이 뼈 있는 말 속에서 대부분의 우리들이 저지르는 잘못된 삶의 습관을 생각한다.

"여행자들은 서로 만나면 자신이 여행한 다른 장소를 이야기 하기에 바쁘다. 인도에선 네팔 이야기를 하고, 네팔에선 인도 이야기를, 뭄바이에선 캘거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삶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살면서도 언제나 어제와 내일을 이야기한다."

왜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걸까? 현재를 행복하게 느끼고 즐기지 못하는 걸까? 바로 이 순간 이 장소를 사랑하고 만족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인도인들은 진정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류시화씨가 인도 여행을 통해 경험한 것들은 언제나 이처럼 철학적이고 행복한 일들만은 아니다.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하고 열병에 걸려 죽을 고생도 했으며, 술 취한 운전사 덕분에 대리 운전을 하기도 한다.

온갖 고생이 있었지만,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시인의 삶은 보다 밝은 빛으로 충만함을 보여준다. 어느 날 길을 잃고, 골목의 끝에서 만난 노인은 그에게 "신을 찾아 헤매지 말라. 신은 네 마음 속에 빛으로 존재한다. 그걸 찾으면 신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멀리 인도까지 가서 직접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 책 한 권을 통해 인도 걸인들의 철학적 사고를 들여다보자. '다음'으로 미루는 게 너무 늦다고 깨닫는 순간, 바로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시점에 당신 마음의 등불은 보다 밝은 빛을 발할 것이다.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김영사(2002)

이 책의 다른 기사

"나는 인도로 간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