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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원숭이 가족. 포파산 오르는 계단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원숭이 가족. 포파산 오르는 계단에서. ⓒ 김남희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서니 마차를 몰고 온 지옌넷 아빠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어제 저녁 먹는 자리에서 포파 산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더니 버스정거장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이 새벽에 오신 거다. 마차에 올라 버스정거장으로 가는 길, 부드러운 실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다.

지옌넷 아빠는 나를 6시에 출발하는 포파행 트럭 앞에 내려준 후 돌아간다. 늘 그렇듯이 트럭 안은 빈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짐과 사람으로 가득 찼다.

차가 출발하니 운전사가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더 이상 느리게 달릴 수는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다.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햇살은 따갑고, 자리는 비좁지, 잠은 오지...

일단 졸기 시작하면 철저하게 망가진 자세로 조는 사람이 나인지라, 쇠로 된 벽에 '쿵'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부딪혀가며 존다. 그 충격에 잠이 깨면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괜찮다는 표시로 씩 한 번 웃어주고, 5분도 못 돼 다시 졸다가 이마를 부딪힌 후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마을에서 바라본 포파산과 절.
마을에서 바라본 포파산과 절. ⓒ 김남희
마운트 포파(Mount. Popa)에 도착하니 오전 9시. 운전 기사는 50km 포장도로를 3시간에 걸쳐 주파하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포파 산은 미얀마 토속 신앙인 정령 신앙(Nat : 일종의 영혼 숭배 신앙)의 본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산의 규모는 작지만 직사각형 모양의 바위산이 언덕 위로 불쑥 솟아오른 형상이라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산이다.

그 꼭대기에 절이 있고, 절까지는 콘크리트 계단이 깔려 있다. 계단 옆으로는 원숭이들이 몰려와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거리를 기다리고 있고, 상인들이 원숭이먹이며 음료수, 절에 바칠 꽃, 기념품 따위를 팔고 있다.

멀리서 본 풍경에 비해 막상 올라가서 들여다 본 절의 내부는 실망스럽다. 미얀마 무속 신앙의 본거지답게 불상과 온갖 무당 상들이 뒤섞인 조잡한 분위기다. 잠시 절을 둘러보고 마당 벤치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낮은 산들과 구릉들, 그 사이의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본다.

다시 긴 계단을 내려와 마을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바간으로 돌아오는 트럭에 오른다.

절 내부는 무당 혹은 영매로 보이는 인형들로 가득하다.
절 내부는 무당 혹은 영매로 보이는 인형들로 가득하다. ⓒ 김남희
나흘을 바간에 머무른 후 미얀마의 역사 깊은 옛 도시 만달레이로 향한다. 만달레이는 미얀마 마지막 왕조인 곰파웅 왕조의 수도였던 곳으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꼽히는 미얀마 제 2의 도시이다.

인형극과 전통 무용 등 고유의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주변에는 크고 작은 유적지들이 산재한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만달레이에서 가장 보고 싶은 건 그 유적들이 아니라 바로 '콧수염 형제'의 공연이다.

휴 그랜트가 영원히 소년이고 싶어하는 '피터팬 증후군'에 걸린 독신남자로 나온 영화 'About a boy'를 기억하는가?

그 영화의 도입부에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누군가 "미얀마에는 농담 한 마디 했다는 죄목으로 7년간 감옥에 갇힌 파파 레이라는 코미디언이 있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바로 이 파파 레이(56)가 'Mustache Brothers(콧수염 형제)'의 맏형이다.

'콧수염 형제는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쓰여진 종이를 들고 코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제들. 맨 왼쪽부터 루 자우, 파파 레이, 루 마이.
'콧수염 형제는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쓰여진 종이를 들고 코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제들. 맨 왼쪽부터 루 자우, 파파 레이, 루 마이. ⓒ 김남희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삼 대째 만달레이에서 코미디언으로 살아왔다. 그는 코미디 공연을 하는 도중 미얀마 정치 상황을 풍자하며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투옥됐다.

면회조차 금지 된 상황에서 돌을 깨는 중노동을 하며 감옥 생활을 하던 그가 5년 7개월만에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서양의 코미디언들 덕분이었다.

미국, 영국, 이태리 등 각국 코미디언들이 연달아 탄원과 성명서를 발표하며 미얀마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조기 석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여행 안내서인 론니 플래닛 역시 자사의 가이드북 '미얀마 2000년 판'에 '이 책을 감옥에 갇힌 파파 레이에게 헌정한다'는 헌정문을 쓰고, 이들에 관한 글을 실어 세계의 여론을 모으는데 힘을 보탰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자유로워졌을까? 상황은 악화되었다. 군사정부의 블랙 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이들의 주요공연장이었던 지역축제, 결혼식 등에서의 공연이 불가능해졌다.

정부와 경찰의 협박에 겁을 먹은 주민들이 그들을 고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론니 플래닛을 보고 찾아오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부정기적인 공연과 직접 만든 인형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도대체 이 황금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어 설명문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설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이 황금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어 설명문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설 수 밖에 없다. ⓒ 김남희
릭샤를 타고 이들의 집이자 공연장을 찾아가니 생각보다 작고 초라한 곳이다. '세종문화회관' 수준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비좁고 낡은 건물이 이들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서글프다.

한쪽 벽에는 전통극에 쓰이는 인형들이 매달려 있고, 낡은 양탄자가 깔린 세 평 남짓한 마루바닥이 무대다. 또 다른 벽에는 아웅산 수지여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 있고 - 그녀는 두 번에 걸쳐 이곳을 찾아와 공연을 보고, 형제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 무대 반대쪽 벽에는 플라스틱 의자 10여 개가 놓여있다.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니 식구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부채를 건네준다. 내부를 둘러보며 기다리는 동안 하나 둘 서양인 배낭족들이 찾아오고 10여 개의 의자는 빈 자리 없이 다 찼다.

공연은 가족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루 마우(53)에 의해 진행된다.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이야기들로 공연은 시작된다. 양복을 빼 입고 핸드폰을 들고 매일 저녁마다 집 앞에서 진을 치며 이들을 감시하는 정보부원들의 흉내를 내기도 하고, 한심한 경찰과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한다.

미얀마 전통 무용을 공연 중인 루 마우의 아내. 만달레이는 각종 전통 무용과 음악, 코미디 등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데 루 마이 역시 전통 무용을 전공했다.
미얀마 전통 무용을 공연 중인 루 마우의 아내. 만달레이는 각종 전통 무용과 음악, 코미디 등을 가르치는 학교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데 루 마이 역시 전통 무용을 전공했다. ⓒ 김남희
루 마우의 이야기 한 토막.

미얀마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직업 하나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업을 갖는 식으로 힘겹게 생활을 꾸려 가는 이 나라에서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는 것은 경찰이란다. 특히 교통 단속 경찰.

헬멧을 안 썼다고 벌금, 신호를 위반했다고 벌금, 중앙선 넘었다고 벌금.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꼬투리를 잡아 딱지를 떼려고 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뇌물을 건네는데 보통 1000쳇 정도가 공정가라고 한다. 호루라기 한 번 불 때마다 1000쳇(약 1200원)씩.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호루라기란다.

하루 종일 호루라기를 불며 시간을 보내니 집에 갈 무렵이면 경찰 모자 가득 지폐가 수북하다. 그래서 경찰 모자를 미얀마에서는 "Gravy Hat"이라고 한단다.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를 하자면, 이 나라는 정말 황당한 나라다. 우선은 정부의 감시와 통제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하다. 언론과 방송이 전부 국영이거나 친정부 매체인 상황에서 내국인에 대한 감시와 탄압, 여론 조작은 기본이다.

워낙에 통제와 감시, 조작이 심해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 등의 국내 현안들은 "...라 카더라."하는 '카더라' 통신을 통해 전해진다고 한다. 그 통제와 감시에서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은 개인 이메일 계정을 쓸 수 없다. 모든 외국인들은 통신청의 검열이 가능하도록 정해진 주소로만 이메일을 보내고 받을 수 있을 뿐이고, 피시방에서 편지 한 통 보내는 가격은 1불이다.

인터넷 한 시간 사용에 1불이 아니라, 편지 한 통 보내는 데 1불! 국제전화는 국가를 막론하고 무조건 1분에 5불.

핸드폰 개통하는 데 드는 돈은 한화 오백만 원. 오십만 원이 아니라 오백만 원. '그럼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인가 보지.' 착각하실 분들을 위해 덧붙인다면 이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300불이 안 된다 (2000년 세계은행 통계 260불).

말린 약초와 나물 따위를 팔고 있는 아이들.
말린 약초와 나물 따위를 팔고 있는 아이들. ⓒ 김남희
1960년대까지 미얀마는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다고 한다. 동남아 최대의 쌀 수출국이자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춘 나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는데,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1962년 레 윈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경제, 정치 어느 한 구석 제대로 굴러가는 면이 없는 나라가 미얀마다. 인플레이션은 해마다 50%가 넘고, 대학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문을 닫고 열기를 반복해 제대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도 없다고 한다. 공교육은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대도시의 학교 선생들은 수업 이후 공공연히 과외로 돈벌이를 한다.

이 나라에서 집값보다 더 비싼 게 바로 자동차 가격이다. 미국의 경제제재와 군사정부의 자동차 수입금지 조치로 인해 90년형 일본 토요타 코로나 가격이 25000불(약 3000만 원)에서 30000불(3600만 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이 나라의 제 2인자가 자동차 수입허가권을 틀어쥐고 부를 축적한다고 한다. 거의 모든 국가 기간 산업은 국영화 되어 있어 정계의 실력자들끼리 나눠먹는다고 한다.

미얀마 정부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단은 당연히 '골든 트라이앵글' - 미얀마, 라오스, 태국의 국경이 맞닿은 지역으로 아편재배와 밀수출로 악명 높은 곳이다 - 지역에서 마약을 재배, 생산해 판매하는 돈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 나라 최고의 직업이자 최고의 신랑감은 세관 직원, 군인, 혹은 달러로 월급을 받는 외항선원이란다.

전통의상을 입고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는 파파 레이
전통의상을 입고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는 파파 레이 ⓒ 김남희
현재 미얀마에는 중소 봉제업체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데 - 미얀마에 대한 투자규모는 한국이 11위 - 외국기업들이 미얀마 정부에게 받는 혜택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혜택은커녕 전기, 전화요금, 건물 및 부지 임대료까지 내국인보다 비싸게 내야한다고 한다. 아시아 각국이 각종 혜택과 편의를 봐 주며 외국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에서 미얀마는 "그래도 돈이 되니까 여기서 사업하는 거 아니야? 싫으면 떠나면 되잖아!"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럼 이 나라 국민들은 왜 데모를 안 하냐고 속 편한 질문을 던질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미얀마 국민들이 아무리 온순하다 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먹고 살기 힘들고, 생존권을 비롯한 기본적인 인권이 짓밟히는데 데모를 안 하겠는가?

해도 크게 하는 바람에 크게 당했다. 1988년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을 때 워낙 철저하게 탄압해 민주화 세력이 초토화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MI(Military Intelligency)로 불리는 정보요원들이 너무나 잘 조직되어 있어 체제 비판이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인 아웅산 수지 여사와 그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 인사들에 대한 연금과 체포를 밥 먹듯이 하는 것만 봐도 이 나라 정부가 얼마나 세계여론을 무시하는 두둑한 배포를 자랑하는 지 알 수 있다.

그저 먹거리가 풍부하고, 추위가 없어서 국민들이 지금까지 굶어죽거나 얼어죽지 않고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라가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한 나라가 미얀마라고 보면 된다.

가면극을 선보이고 있는 루 자우
가면극을 선보이고 있는 루 자우 ⓒ 김남희
공연은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루 마우의 아내와 딸과 조카 등 전 가족이 보여주는 전통 무용이 공연의 주된 내용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나를 슬프게 한 건 파파레이였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 그래서 영어가 가능한 동생이 진행을 하는 동안 대사가 없는 '슬랩 스틱 코미디'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조합해 러시아어나 아랍어 흉내를 낼 때만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모국어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음을 그는 아프게 보여준다. 뛰어난 코미디언일 그가 언제쯤 다시 모국어로 자기의 재능을 펼칠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인형을 사기도 하고,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도 나눈다.

루 마우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계속 이곳을 찾아와 이들이 공연을 계속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부탁한다. 내가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그저 우리도 그런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희망을 버리지 않고 싸우다 보면 머지 않아 민주사회가 올 것이라는 쉽고 뻔한 말 밖에는 없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바로 '쉽고 뻔한' 말과 믿음에 기대어 삶을 버티어 가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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