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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전에 우리(FN)와 함께' 국민전선(FN) 광고
'너무 늦기전에 우리(FN)와 함께' 국민전선(FN) 광고 ⓒ FN
2002년 4월 21일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랑스 대선 1차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자끄 시라크 현 프랑스 대통령과 극우당 국민전선(FN) 당수 장 마리 르펜이 결선에 오른 것이다.

17.28%를 득표한 시라크는 16.86%의 르펜을 간신히 앞질렀지만 르펜의 오른팔이던, 그러나 지난해 대선에서 르펜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 출마한 브뤼노 메그레가 획득한 2.12%까지 감안하면 극우파에 표를 던진 프랑스인은 거의 19%를 넘어섰다. 프랑스의 언론은 이 사건을 일러 '청천벽력', '정치대지진'이라 했다.

4·21 정치대지진은 시작에 불과했다?

누구였을까. 극우파에 표를 던진 사람은. 아침마다 바게뜨를 사러 들락거리던 제과점 주인이었을까. 하룻동안의 우편물을 정리해주던 아파트 경비원이었을까. 혹은 이웃 사람이었을까. 지하철에 함께 오른 승객 10명 중 2명은 극우파를 찍었다. 맞은 편의 노신사일까, 아니면…

대선 1차 결과를 접한 직후부터 필자는 이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장을 보고 버스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필자만의 조바심은 아니었을 게다. 당시 프랑스 땅에 발 붙이고 살던 이방인이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자문해 보지 않았을까. 마치 이웃의 유대인을 신고하기 위해 수화기를 들던 프랑스인들을 색출코자 서로 수상한 눈길을 던지던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풍경과 흡사했으리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곧 이어 촉발된 반 르펜의 함성이 거리를 휩쓸고 그로부터 결선에서 82%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시라크의 재선이 결정되던 순간까지 급박했던 보름은 가히 '감격'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었을까. 비록 4·21 대이변이 프랑스 극우파의 건재를 알리는 서막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정치대지진이 1년 반 지난 오늘 프랑스가 불안하다.

프랑스인 4명 중 1명이 르펜 이념에 동의

극우 이념이 프랑스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프랑스인의 22%는 극우당을 지지하고 28%는 설령 극우당 소속 후보가 지방 도의회 의장에 선출된다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의 여론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극우당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극우파 출현 이후 최근 20년 동안 꾸준히 여론 동향을 파악해 온 <르몽드>가 실시한 이번 16번째 설문조사는 프랑스 극우파에 대해 경계경보를 울리며 동 일간지 12월 10일자 1면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르몽드>는 국민전선의 우두머리 르펜이 불안을 조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 영향력과 선거 역량면에서 국민전선이 주요 정치 세력임을 과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2%의 프랑스인이 '전적으로' 혹은 '충분히' 르펜의 이념에 찬성한다고 했고 적대적 의견을 제시한 응답자는 75%였다. 이것은 11%의 르펜 지지율을 보였던 1999년과 17%를 기록한 2000년의 결과보다 상승한 것으로 2002년 대선 1차 결과가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년 꾸준한 지지 증가세를 보여왔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프랑스의 전통 가치를 옹호하라

'FN은 한가지 프로그램밖에 없다.색깔을 제거하라' 국민전선(FN) 반대 포스터
'FN은 한가지 프로그램밖에 없다.색깔을 제거하라' 국민전선(FN) 반대 포스터 ⓒ JC
르펜의 주장을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프랑스인도 지난해 41%에서 올해 42%에 그쳐 대다수를 차지하지 못 했다. 반면 르펜의 주장은 '정당하다'는 대답은 13%에 달했다.

국민전선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대답한 70% 중 다시 68%는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국민전선 소속 후보가 도의회 의장에 당선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거나 충격적인 일'이라고 대답했으나 28%는 '용인'할 수 있으며 4%는 '바람직하다'고 했다.

국민전선의 주장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 호응을 얻어내고 있는 것은 2002년과 마찬가지로 34%의 응답자가 집중된 '전통 가치 옹호'와 '민생치안'이었다. 지난 해 반 르펜 전선에 맞서 강행한 극우당 유세전은 일종의 해프닝이었는데 전후 프랑스를 상징하는 베레모를 눌러쓴 당원들은 손에 손에 바게뜨를 들고 프랑스 전통 가치의 회복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러나 28%의 응답자가 꼽은 '민생치안'의 경우 1년 전 40%의 공감대를 일으킨 사실과 비교해 대폭 후퇴했는데 현 프랑스 내무장관 니콜라 사코지의 적극적인 치안대책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53%의 응답자가 경찰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질' 것을 희망했지만 2002년의 76%와 비교하면 명백히 감소했다. 이 수치는 파업을 비롯해 마약·매춘·불법체류자에 대해 강력한 규제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현 프랑스 정부의 파시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밖에 국민전선의 배타적 이민정책의 지지도가 23%에 그쳐 국민전선이 태어난 1985년 이후 최하를 기록했지만 설문 대상자 59%가 '프랑스에 이민자가 너무 많다'고 대답한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44%의 응답자는 '프랑스가 더 이상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으며 반대의견은 54%였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40%의 응답자가 사형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했으며 58%만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이다. 반면 국민전선 당원의 경우 사형제도 부활에 찬성한 비율이 무려 84%에 달했다.

청년층도 더 이상 극우파의 적은 아니다

2003년도 설문조사는 결국 국민전선이 그들의 지지자들로부터는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국민전선의 이념에 찬성을 표시한 노동자와 상인, 기업가가 32%로 조사돼 전체 평균을 훨씬 능가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기현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이것은 이미 지난해 대선 결과 수없이 지적돼 온 문제로서 실업문제 심화가 가져온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는 진단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번 결과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처음으로 청년층이 더 이상 국민전선의 강력한 반대파가 아니라는 것.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이 22%가 국민전선의 이념에 찬성, 2002년의 19%와 비교해 3% 포인트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또 34%는 르펜의 치안 대책에 동의했고 19%가 르펜에 긍정적 의견을 표시해 전체 응답자보다 2% 포인트 높은 결과를 가져왔다. 더 혼란스러운 사실은 18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 층 27%가 취업 부문에서, 28%는 사회보장 급여 부문에서 '프랑스인에게 우선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프랑스는 1년 반 이전과 같은 질문을 심각하게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느니 차라리 보는 법을 배우고 수다 떨 시간에 행동하시오. 적어도 세상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거요. 민중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노래하기에는 아직 일러요!"

1944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던진 충고는 오늘의 프랑스에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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