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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도 저는 김밥을 말았습니다. 몇 개 말아놓은 것이 없었는데, 손님들이 갑자기 연달아 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순간에 직면하게 되면 초보인 저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빨리 몇 개를 말아서 싸주고 나서 다시 여러 개를 말아놓습니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저의 눈에는 김밥밖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도 몇 가지씩을 빼놓기 때문에 종종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재료들을 미리미리 점검해야 하고 냉장고에 정리해서 두어야 하는데, 김밥 마는데 정신이 팔리면 좀 전에 하려고 했던 일도 잊어 버립니다.

급기야 오늘은 주방 이모가 화를 내었습니다. 주간에 일을 하는 그 주방 책임자는 저랑 2시간 동안 같이 일을 하게 됩니다. 밤 11시에 퇴근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밤 9시에서 11시까지는 바쁜 시간입니다. 갑자기 우르르 손님들이 왔다가서 당황했기 때문에 저는 김밥을 말고 있었습니다. 주방에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를 팽개쳐두고 말입니다.

주방에서 바라보면 할 일을 제쳐두고 김밥 말고 있는 제가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일이 없을 때에는 좋게 가르치듯이 말을 하는데, 오늘은 화가 많이 난 것입니다. 사실 일이 많아서 라면도 끓여 놓고 먹지도 못한 것을 뻔히 보았는데, 제가 눈치가 없어도 한참 없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렇게 한 소리 듣고 하는 설거지는 참 힘듭니다. 같은 일이라도 내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순서도를 그려서 하는 일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노동의 강도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당연히 설거지하는 소리가 커지고, 물이 이리저리 튑니다. 수저는 여러 번 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씻게 됩니다.

얼굴 표정이 좋을 리가 없고, 피곤한 몸이 더욱 피곤해 집니다. 그러나 주방 이모도 퇴근할 때쯤 다시 조용하게 저에게 선후를 잘 따지라면서 충고를 합니다.

저는 서로 생각하는 우선 순위가 다른 것 같다며, 중요도를 말해달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요령을 피운 것도 아니고,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굉장히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초보는 괴롭습니다.

밤 11시쯤에는 주방 이모도 야간담당자로 바뀌고 사장님도 퇴근을 합니다. 이상하게도 11시가 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사장님이 있으면 오히려 얼굴이 더욱 안 좋아집니다. 손님들에게도 그다지 상냥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인사도 더 잘하고 일도 이것저것 해보게 됩니다.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사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야간에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장소가 장소여서 그런지 유흥업소에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PC방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주요 고객들입니다. 새벽에는 운동하는 사람들과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취객들도 많습니다.

새벽 2시쯤 교복에 어울리지 않은 헤어스타일에 인조 속눈썹을 붙이고 '아이참'으로 쌍꺼풀을 만든 여중생과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상의는 교복 자켓이고, 하의는 '츄리닝'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장이었습니다.

별다른 말없이 들어온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주문을 부탁하니 라면 하나와 김밥을 주문합니다. 김밥을 한 줄 썰고 있으니,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4개를 더 썰어 달랍니다.

라면이 나오고 5줄의 김밥으로 가득 찬 접시를 내어오니 어머니는 그릇들은 아이 앞으로 가져다 줍니다. 여중생은 젓가락을 집어들고 라면을 조금씩 먹습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어색한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의 안부를 묻고 어디 있었냐는 식의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보아 가출한 자녀를 데리고 오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라면만 먹는 아이가 애처로운 듯 김밥을 계속 들이밉니다. 과도한 관심은 오해를 부를 수 있어 저는 조용히 김밥 마는 곳으로 가서 김밥을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유리창으로 비치는 두 모녀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합니다.

결국 김밥 5줄은 고스란히 은박지에 담겨 포장되고 맙니다.

심상치 않은 사람들이 왔다 가면 가게는 조금 시끄러워집니다. 무슨 사연일까를 두고 말들이 오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김밥 말자'로 끝납니다.

제일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아무래도 취객들입니다. 아직까지 행패를 부린 사람은 보지 못했는데, 주문한 것을 가지고 나오면 도로 포장해 달라고 하던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일하는 사람들 것까지 주문하여 같이 먹자고 떼를 쓰는 50대 아저씨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조그마한 시비도 붙으면 안되기 때문에 조용히 유리창만 닦습니다. 불쑥 들어와서는 휴지만 떼어가서 신발을 닦는 사람도 있답니다.

황당하긴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물론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사람도 있지만 말입니다.

가게 바로 앞의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이 사람들은 벌써 한달 가까이 외상으로 밥을 시켜먹고 있습니다. 한번 외상을 주고 나니 계속 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사장은 전날 주문한 것을 확인하면서 좋지 않은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배달 가지 말라는 소리냐고 물으면, 또 그것은 아니랍니다. 깨끗하게 해결을 보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외상은 포기하고 이제라도 주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사장 마음은 또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괜히 우리한테 말을 하니 마음만 불편합니다.

사장이 몇 번 외상값 때문에 찾아가고, 사장의 불평을 듣고 배달을 하는 우리들도 다른 손님들에게 대하는 것과 다른 표정과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 사람들도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이고, 먹는 것 가지고 말을 한다는 것이 상당히 치사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너무나 당연한 듯이 외상거래를 하고도 미안한 마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람들은 참으로 얄미웠습니다. 게다가 기본 반찬만 나가는 메뉴를 주문하고도 꼭 반찬을 더 달라고 하니 줘야 하는 반찬도 도로 담고 싶어집니다.

서로의 불편한 마음이 결국은 터지고 말았습니다. 쟁반을 두고 갈 수 없냐는 요구에 쟁반이 몇 개 되지 않아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좀 떨어져 있던 매니저가 저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돈을 부쳐줬는데, 일개 종업원이 무슨 말을 하냐며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거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지요. 돈을 달라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외상 먹지 말라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차분히 저는 제가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흥분한 그 사람은 사장을 불러오랍니다. 일개 종업원과는 말할 필요가 없답니다. 기가 차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따지고 들자 주변 사람들이 말립니다.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화를 참고 가게에 앉아 숟가락을 닦고 있으니, 그 주점의 다른 사람이 와서 사과를 합니다. 돈 달라는 소리인줄 알고 그랬다며 이해하랍니다. '츄리닝'에 슬리퍼 끌고 온 그 사람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건들거리며 말을 합니다.

저것이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싶어 한소리를 하고 나니, 결국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이 말을 부르고, 외상 거래에 대한 불편한 심정까지 다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요. 그 사람은 저에게 '싸가지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피차일반이라면서 대응을 합니다. 보다 못한 주방 이모가 나와서 그 사람을 데리고 나갑니다.

그냥 알았다고 하고 일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말만 했으면 별 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매일 사장의 짜증난 말들이 저의 마음속에 쌓여 있었나 봅니다. 이 김밥집 사장과 단란주점 사장이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데, 괜스레 흥분했다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기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계속해서 혼자 뭐라 뭐라 떠듭니다. 주방이모는 과했다며 그냥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돌아가서는 저처럼 저의 욕을 마구 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더 이상의 주문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직 외상값이 남아있기는 한데, 이것은 사장님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겠지요. 손님을 내가 떨구었나 하는 생각이 약간 들지만, 잘 되었다는 안도감이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김밥 마는 것보다도, 밤을 지새우는 것보다도, 사람을 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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