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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14일,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며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오만한 미국규탄과 주권회복을 위한 범국민평화대행진'에 참가한 산하.
지난 해 12월 14일,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며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오만한 미국규탄과 주권회복을 위한 범국민평화대행진'에 참가한 산하. ⓒ 이양훈
집사람이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들을 집에 두고 모꼬지를 갔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들과 한 밤을 지새우게 되었지요.

평소 좋아하는 컴퓨터를 못하게 하는 엄마가 집을 비우자 맘껏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오히려 좋아하는 기색이었습니다. 배고프다는 얘기도 없더군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기에 토요일 점심은 라면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통닭을 한 마리 시켜 맥주 한 잔을 했습니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들어보니 아이들은 밤 11시가 넘도록 TV를 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또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기꺼이 거기에 동참을 했지요.

"뿅뿅" "쾅" "으악!" 두 대의 컴퓨터에서는 총과 대포 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집사람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슬슬 걱정이 되더군요. 왜냐하면 라면먹은 그릇이며 맥주 마신 잔해 등 '설거지 거리'들이 부엌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엌 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하룻만에 그야말로 폭격을 맞은 듯 난장판이었지요. 남자들 셋이 이룩한 빛나는 성과(?)였습니다. 선뜻 치울 맘이 생기지 않았지만 치워야 했습니다.

작년 여름, 구레포해수욕장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나가서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 거야'를 열창하고 있는 산하
작년 여름, 구레포해수욕장에서 열린 노래자랑에 나가서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 거야'를 열창하고 있는 산하 ⓒ 이양훈
저는 설거지를 하기로 맘을 먹고 아이들에게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설거지 할테니까 너희들은 집안을 치워라!"

그릇을 하나 하나 씻으며 살짝 곁눈으로 보니 큰놈이 아주 열심히 집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진공청소기까지 꺼내들고 나왔습니다.

"야! 그건 안해도 돼!"
"아녜요! 해야 돼요!"

걱정과는 다르게 엄마가 하던 것을 봐와서인지 그 녀석은 능숙하게 청소기를 돌리며 구석구석의 먼지를 빨아 들였습니다. 순식간에 거실과 자기 방을 다 치우고는 아버지 방도 치우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렸습니다. 그때쯤 저도 막 설거지를 끝냈습니다. 우리는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지요.

작은놈! 그 놈은 그때까지 꼼짝도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었습니다.

슬슬 배가 고픈 것을 느끼고 조금 이른 점심을 차렸습니다. 있는 반찬에 계란 볶음밥(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입니다)을 잔뜩 만들어서 한 그릇씩을 나눠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 큰 놈이 벌떡 일어서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작은 놈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막 첫 숟가락을 뜨고 있던 동생에게 바싹 얼굴을 들이대고는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공중을 향해 오른팔을 '쭉!' 뻗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일하지 않는 놈은 먹지도 마라!"

그 녀석 이제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물으면 노고지리의 '찻잔'이나 채은옥의 '빗물'이라고 서슴없이 얘기하는 황당한 녀석입니다. 녹색지대의 '사랑을 할 거야'를 즐겨 부르고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기도 하지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어릴 때부터 봐왔던 노동자의 힘찬 몸짓과, 차를 타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던 민중가요를 나름대로 절묘하게 결합시킨 멋진 '1인 시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저녀석이 애엄마 뱃속에서 막 나오려고 요동치던 때가 생각납니다. 95년 11월 11일이었습니다. 해산일을 오늘 내일 앞두고 있던 집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애 낳고 있어라! 나는 민주노총 출범식에 가야겠다!"
"가는 건 자유다! 그러나 지금 나가면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올 여름, 의정부 기지신설 반대 농성장을 지지방문한 산하
올 여름, 의정부 기지신설 반대 농성장을 지지방문한 산하 ⓒ 이양훈
그래서 민주노총 출범식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해 1주년 때에도 그 녀석의 돌잔치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요.

그녀석이 벌써 이렇게 컸습니다. '산맥처럼 당당하고 어떤 일에도 강물같은 포용력을 지니라!'는 뜻으로 지어준 '산하'라는 이름처럼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 녀석이 대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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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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