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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두어도 될 근정전월대 세척작업. 해태를 밟아가며 세척을 해야했는지...
그냥 두어도 될 근정전월대 세척작업. 해태를 밟아가며 세척을 해야했는지... ⓒ 황평우
지난 2000년 1월 15일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갔던 경복궁 근정전이 3년 10개월동안 72억원의 예산을 들여 보수 공사를 마치고 마침내 다시 공개된다.

태조 4년(1395년) 조선왕궁의 정궁으로 창건된 경복궁은 광화문 대로에 위치하면서 동, 서로 육조, 사헌부 등의 관아를 두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시 대부분이 불에 타, 이후 270 여 년 간 폐허로 방치되다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광화문과 함께 복원되었다.

그러나 1873년,1876년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보이는 큰 화재가 창덕궁에 발생하여 경복궁의 주요전각들을 뜯어 창덕궁 복원이라는 미명아래 경복궁을 훼손하였다.

1888년 주요건물이 복원되었으나, 1910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도성과 문루들이 파괴되기 시작하고, 급기야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흥례문 등 주요전각을 헐고 공진회 장을 건립하며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주변전각을 헐어버렸다.

일제패망 후 자유당 정권에 의해 광화문 주변이 훼손되기 시작하더니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광화문의 문루는 소실되고, 석축은 탄흔투성이로 변했다. 1968년 박정희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역사복원에 나서며 광화문을 원위치보다 14.5m 뒤쪽에 다시 건축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교란된 광화문일대를 더욱 파괴하고 교란시켰다. 1998년 8월 문화재청에 의해 5대궁 주요 고건물 긴급안전진단 결과 근정전의 고귀주(가운데 제일 높은 기둥)가 문제가 있다고 판정되어 해체 보수공사에 들어갔으나 해체를 하고 보니 고귀주 4개가 모두 심하게 훼손되어, 공사기간을 연장해서 전면 보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쉬운 것은 보수에 사용될 18m에 달하는 고귀주로 사용할 소나무가 국내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워 수입산 다그러스퍼(북미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 당시도 고귀주 4개중 1개만 육송(소나무)를 사용했고, 3개는 전나무로 사용한 것이 판명났다.

또한 이번 보수공사의 책임자였던 신응수 대목장은 추녀도 3곳을 수리했으며, 교체된 부재가 차후에 문제가 될 것에 대비해 철물로 보강을 했다고 밝혔으며, 지붕공사도 노후, 퇴락된 기와 4만 7524매를 교체했으며, 지붕내부에 30~130㎝ 두께로 보토된 흙의 하중으로 인해 문제가 될것에 대비해 10~30㎝ 두께로 하여 하중을 경감시켰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보수후에 폐자재들은 모두 폐기했으나 근정전 폐자재들은 부여 전통문화학교에 보관하여 학술자료로 활용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궁궐의 내부 전각에 볼거리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근정전 내부에 궁중생활상을 재현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궁중생활상은 정조시의 대조회를 기록한 정아조회지도(正衙朝會之圖)를 기본으로 했다고 했으나 정조때는 경복궁이 폐허되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기자의 질문에 '연출'이라고 답변했다.

문화재청은 11월 14일 오후 2시 근정전 보수 준공행사와 함께 '고종황제 등극의례'를 재현하며 일반시민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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