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송성영
빵점 맞고도 당당한 우리 집 ’빵점 짜리 인상이’가 요즘은 70점 80점은 물론이고 가끔씩 100점도 받아오고 있습니다(지난 5월 ‘아빠 나 오늘 빵점 맞았다“ 기사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몇 개월 사이에 빵점 짜리가 100점을 받아올 수 있냐구요?

관련
기사
“아빠, 나 오늘 빵점 맞았다~아”

특별 과외라도 시켰냐구요? 유치원 경력 1개월에 학원은 물론이고 그 흔한 학습지 교육조차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비결은 따로 없었습니다. 빵점 맞게 그냥 그대로 내버려뒀다는 것입니다. 다만 숙제 정도를 엄마와 함께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은혜 갚은 꿩, 옛날에 한 나그네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쉭, 쉭, 쉬이익…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책 읽기에서도 신통치 않았던 녀석이 한 달 전쯤에는 자다가 갑자기 도를 깨친 녀석처럼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은혜 갚은 꿩’을 거침없이 읽고 있었습니다. 책을 보면서 읽는 줄 알았는데 책도 없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3쪽 분량의 이야기를 다 외웠던 것이었습니다. 작정하고 외운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읽다보니 저절로 외워졌던 것입니다.

요즘 인상이의 ‘은혜 갚은 꿩’은 ‘손님 접대용’이 되었답니다. 전에는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 재미있는 '거리'가 없으면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나름대로 터득했다는 태극권 시범을 보였거든요.

“인상아, 그거 한번 외워 볼텨.”

태극권 시범을 보일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기다렸다는 듯 예의 그 이야기를 줄줄줄 늘어놓습니다.

“은혜 갚은 꿩, 옛날에 한 나그네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또 전에는 도맡아서 나머지 공부를 했고, 반에서 덩치가 가장 큰 편인 녀석이면서도 늘 얻어맞고 오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괴롭히는 아이들도 없다고 합니다. 학교 다니기가 재미있다고 합니다. 아주 가끔씩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지만 그것도 재미있다고 합니다.

"너 나머지 공부하면 안 챙피허냐?"
“아니, 나머지 공부 재미있어, 다시 공부하니까 쉽잖아.”

푼수 아빠는 손님들이 올 때마다 은근히 새끼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애들은 역시 냅둬두 공부 헐 때가 되믄 다 하는 거 같아요. 빵점 짜리 우리 인상이가 말입니다. 요즘은 백 점도 받아 온다니께유….”

‘아이들은 어른들이 억압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일어설 수 있다.’

요즘 나는 인상이의 '눈부신 성장'을 통해 개념적으로만 정리되어 있던 교육관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빵점 짜리 인상이’에 대해 조바심을 냈다면 인상이는 아주 오랫동안 빵점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고 학교도 가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인상이에게 빵점에서 벗어나도록 강압적인 교육을 시키는 대신 공부하기 싫으면 싫은대로 내버려 뒀습니다. 숙제 하나 만큼은 꼬박 꼬박 시켜왔지만 지금 당장 모르는 문제는 언젠가 술술 풀리게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빵점과 백 점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려 줬습니다.

혹여 빵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빵점 맞아도 신경 쓸 거 하나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백 점보다 오히려 빵점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백 점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힘든 것이고 빵점은 언제 어느 때고 얼마든지 빵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줬습니다.

사실 인상이는 빵점에 대해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습니다. 인상이뿐만 아니라 본래 세상 모든 아이들은 빵점에 대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른들이 빵점과 백 점에 대해 엄격하게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점수란 그저 땅 바닥에 선을 긋고 장난치는 놀이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선이 잘못 그어지면 빵점이라 여기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잘못 그어진 선은 지우고 다시 그으면 그만이니까요.

ⓒ 송성영
빵점 맞던 인상이가 백 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상이를 비롯한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억압’ 당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힘이 있습니다. 짐승이며 나무며 풀이며 세상 만물들이 다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인들 그걸 못하겠습니까?

'너무 어려서, 어리석어서 할 수 없다. 일으켜 세워 줘야만 한다' 라는 그 어떤 두려움 때문에 강압적인 힘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 또한 그런 강압적인 힘의 논리에 의존해 살아왔기에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여기고 있고 또한 그 논리를 아이들에게까지 주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이런 식으로 빵점에 대한 묘한 논리를 펴 나가면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지금이야 초등학생이니까 공부를 못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면 또 달라요. 초등학교 때 기초가 안 닦여 있으면 그 때가서 후회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기초가 부실해 빵점을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에게 해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빵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100점을 맞는다 해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그때 가면 그 상황에 맞게 또다시 스스로가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뭘 모르는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 고등학생 때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들 합니다. 글쎄요?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 안 받게 될지 솔직히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상이는 아직까지 빵점을 받아와도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 안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지금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기 때문이며, 또한 미래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줄곤 평균 80점이 넘던 인상이 녀석이 며칠 전에는 난데없이 20점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인상이가 요즘 백 점도 받아 온다고 <오마이뉴스>에 올릴 기사를 신나게 쓰고 있는데 아, 이 녀석이 글쎄, 20점 짜리 시험지를 턱 하니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너 20점 맞고도 안 챙피해?“
“아니?”

인상이 녀석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20점 짜리 시험지를 휙 하니 던져 놓고 자기 할 일을 찾아 나갑니다.

바로 며칠전에 백 점을 받아왔던 녀석이 20점이라니 아이들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분명 ‘기계화’ 되어 있는 어른들과는 다릅니다. 아이들은 신비롭습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고 빵점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백 점 짜리 시험지를 내밀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인상이가 학교에 가다말고 가방을 등에 멘 채 뜬금없이 그럽니다.

“아빠 꼬마야 꼬마야 하자!”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짚어서 짚어서 만세를 불러라…’ 라는 노래를 불러가며 하는 줄넘기 놀이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눔아, 시방 학교에 가야 허는데 뭔 놈의 줄넘기는 줄넘기여.”
“아빠가 어제 밤에는 어두워서 못하니까 오늘 하자고 그랬잖어.”
“안 돼! 얼른 학교에 가야지. 너 지각허믄 선생님헌티 혼난다.”
“오늘 한다구 그래놓고….”

떼를 쓰다가 결국은 울음보까지 터트렸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침부터 마당 한 가운데서 네 가족 모두가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침부터 팔자에도 없는 줄넘기 놀이를 하고 있는 부모와 형아 속도 모르고 인상이는 눈물을 훔쳐 가며 폴짝 폴짝 잘도 뛰었습니다. 다들 별 감흥 없이 뻣뻣하게 서서 줄을 돌리고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나는지도 모르는데 녀석은 히죽히죽 웃어가며 팔짝 팔짝 잘도 뛰었습니다.

"꼬마야 꼬마야 뒤로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짚어서 짚어서 만세를 불러라, 불러서 불러서 잘 가거라!"

그 날 인상이는 줄넘기 놀이를 신나게 하고 기분 좋게 학교에 갔습니다. 이런 녀석에게 어떻게 시험 점수를 잘 받아오라고 하겠습니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