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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윤영
“지금 되돌아보면 그 당시에는 힘들어도 목표가 분명히 있는 사람은 다 성공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묵묵히 하다보면 자신의 일에 있어서 어느새 일인자가 돼 있어요.”

권트리머 애견미용학원 수강생들과 김천대 애완동물 뷰티패션과 학생들은 수업이 시작되기 10분 전 이러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목표로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이 권태봉(44) 원장이 지나온 발자취를 통해서 얻은 삶의 철학.

권트리머 애견미용학원 권 원장은 지난 84년에 대전에서 최초로 애견매매와 애견미용을 시작한 사람이다. 당시 애견관련 문화나 시장이 지금의 몇 분지 일에 불과할 정도로 시장성이 없었지만 그의 공부하는 자세는 그를 결국 성공의 길로 이끌었다.

“원래는 음악활동을 했었어요. 통기타를 하면서 가수의 꿈도 가졌었지만 여의치 않아 애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애견 숍을 보고는 대전에서 가게를 열었다. 지금과는 달리 20년 전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애완견이라는 아이콘이 자리를 잡기 전이었고 따라서 그가 겪었던 어려움도 매우 컸다. 애완견을 종류별로 갔다 놔도 사람들의 인식이 미비했고 주위 사람들은 음악의 길로 나가는 줄 알았지만 애견 사업에 뛰어든 그를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러는 ‘개장사’를 한다고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실패도 여러 번 경험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았어요. 투자한 돈을 까먹으면서도 끝까지 버텼습니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실패를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수라고 생각한 것은 그만의 다부진 의지였다. 애견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음악 활동도 병행했다. 집을 잃기도 하고 돈 벌이 수단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등 금전적으로 힘든 시기를 4번이나 겪었지만 음악 활동 수입으로 근근이 다시 사업을 이어 나갔다. 그는 대신에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애견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 애견 붐이 일어났고 앞만을 보고 달려왔던 그동안의 결실들이 오늘날을 있게 했다.

“97년부터는 정식 애견 미용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IMF 때 다시 한번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학원생이 5배나 늘었어요. 학원생 150명과 김천대 뷰티패션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 150명, 총 300여명의 학생이 저에게 애견미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 권윤영
학원 수강생 중에는 대전 사람도 많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대구, 김천, 구미, 목포 등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다. 그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자연스레 배우기도 한다.

권 원장은 3년 전부터 소년 소녀 가장, 독거노인 등 5군데를 후원하고 있는데 그 중 4곳은 그가 직접 도움을 주는 곳이고 나머지 한 곳은 학원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성공의 기쁨보다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더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남을 도와가면서 살고 싶네요.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세상이 더불어 사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애견토탈센터를 꿈꾸고 있다. 한 건물 안에 애견 숍, 애견미용 학원, 애견 카페, 동물병원, 애견 전시장 등을 한꺼번에 들여 놓는 것. 그것을 운영하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그가 지난 20년간 축적한 기술을 가르쳐 주고 싶다고 말한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이 열리기 마련이죠. 원래 제 꿈은 가수였어요. 음악만 잘하고 개는 좋아할 뿐이었는데 가수의 꿈이 닫히자 애견 사업으로 문이 열렸잖아요. 다른 문이 열릴 때까지 못 참아서 그렇지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문이 열릴 것입니다.”

음악 활동을 못하게 됐을 때는 마음도 아팠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 보다도 자신 있게 일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는 그는 이제껏 삶에 후회 해본 적 없다. 앞으로는 남을 돕는 일에 더 신경 쓰며 살아야겠다는 권태봉 원장. 그는 기자가 찾은 그날에도 어린아이 분유값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며 포도를 싸들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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