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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신을 부정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 바탕은 모태신앙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출근해서 의자에 머리를 눕히고 무슨 생각인가를 하다가, 여러 번 들어 익숙해진 구절을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영생은 무엇인가. 인생 백년도 안되는 삶을 살면서 숱한 기복을 겪는데 영생이 있다면 지금의 삶은 잠시 스쳐 가는 정류장이란 말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곤고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화두 중에 하나가 '신'이 정말 있냐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해 가슴앓이하는 세상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신의 실존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존재하는 것 같으나 존재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의 영역은 믿음이라는 추상적 확신이 없으면 설명이 곤란하다.

정말 신은 있는 걸까

한 편에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존재가 인간이므로' 신도 인간을 닮았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한 편은 '신이 인간의 형상을 하는 자체가 신이 없다는 걸 증명한다고 말한다. 양쪽 주장 다 일리가 있어 보이고 그럴듯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하지 않다.

신의 존재는 인간이 풀고 싶어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창조론적 입장에서 신의 영역에 접근하려 하면 할수록 충돌되는 또 다른 명제 앞에 증명의 오류를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첫째 날에 무엇을 만드시고… 여섯 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일곱 째 날에 쉬었더라"는 창세기의 기록을 믿자면 우주가 생기기 전에 이미 시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믿으면 신은 시간의 영역밖에 있어야 한다는 명제와 충돌하게 된다.

만약에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우주를 만드셨다면, 그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 보다 먼저 있었어야할 신이 필요하고, 먼저 있는 신의 앞에 또 다른 신이 있어야 하는,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끝없는 증명의 한계에 부딛친다.

왜 이렇게 복잡할까. 그것은 유한의 시간 안에서만 사고하고 유추하는 '사물'들의 한계로 신의 섭리를 자연현상 범위 내에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 중,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은 "신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난 신의 개념이 신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신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믿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이름이 생각 안 나는 누구의 주장과 맥이 닿는다.

또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의 이론인 "신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신비로운 인격을 만들어 냈다"는 주장과도 일치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이론이 맞는가. 대답은 '노'다. 이 이론들은 심리학적으로 내면의 세계를 설명하려한 것일 뿐, 우주를 누가 창조했는가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가 신을 부정하기 위해 많은 학설을 제기한 것처럼, 유신론자들도 신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학설을 내어놓았다.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한 학설 중에 하나가 토마스 아퀴너스가 창시한 우주론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논증방식이다. 우주의 기원과 생성, 그리고 우주의 현상과 존재로부터 실존의 실마리를 찾으려한 논증방식으로 신의 실존을 주장하는 학자들 중의 대표적 학설이지만 이것 또한 증명에 대한 오해를 풀기엔 미진하다.

아퀴너스는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필연적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인간의 근원을 우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찾으려 했다. 삼라만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지만,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만물을 만들어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를 만든 근원자를 만나게 된다는 이론이다.

즉, 무한퇴행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종착점인 원인자가 있게 되는데 그 원인자가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라는 주장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움직이고, 없는 것 같지만 있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존재하는 신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논증방식으로 우연적인 존재들로부터 우연을 연결시켜 주는 존재를 찾는 방식을 제시했다. 이 방식은 주변의 모든 것이 우연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어떠한 것이 우연이더라도, 우연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자가 없다면 우주는 존재자체가 없었겠지만,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존재의 성질이 있는 한 의존해야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고 그 의존자는 신이라는 주장이다.

쉽게 말하면 너희를 누가 만들었겠냐는 이론으로 창조론과 비슷하지만 공간상으론 비슷해 보여도 시간상으론 차이가 나는 주장이다.

또한 그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역설적으로 존재한다고 했고, 실존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부정당하는 것이 다른 모습으로라도 존재하여야만 존재가 어딘가에 의존할 수 있다는 논리도 폈다.

아퀴너스는 이 방식말고도 보편적 정도의 가치에서 신이라는 절대가치로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설계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목적론적 방법으로 신의 실존을 증명하려 했다.

이 주장은 '비우연적' 근거를 통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만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긍극적 근거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도출된 근거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필연적 존재'라는 논리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여러 가지 방식을 택한 아퀴나스의 이론이 절대적이냐 하면 이것 역시 대답은 '노'다. 까닭은 종착점이 신이라면 그 앞에는 무엇이 있었냐는 반복적 의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너스의 논리에 대해 제기된 가장 전형적인 철학적 반대는 '필연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연'을 바탕으로 하는 사물들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명제' 만이 필연적일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에 관해서 평하는 자체가 언어의 오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박하는 근거는 필연적 존재의 개념은 논리적 필연성 보다 사실적 필연성으로 접근하는 것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신의 설명에 가까운데, '신은 필연적인 존재이다' 라는 말과 '신은 존재한다'는 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어찌 보면 단어 하나로 트집잡는 말장난에 불과하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기여하진 못한다는 생각이다.

심란한 척 하느라 잠재된 무의식이 삐져 나와 하나님을 찾았지만, 보았냐고 물어보면 내 대답도 '노'다. 하지만 실존을 믿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예스'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어떠한 방식, 어떠한 이론으로 접근하더라도 있다라던가, 없다라고 명쾌한 답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경험하는 인간이 시공을 초월한 세계를 알려한다는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이런 저런 이론과 상관없이 믿는 것이 최고란 생각을 한다. 성경에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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