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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책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 한겨레 신문사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또 타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들해지고
인생은 길 없는 숲 같아
거미줄에 얼굴이 근지럽게 달아오르고
한 눈은 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면
잠시 땅을 떠났다가
돌아와 새 출발을 하고 싶다.
.....자작나무 타는 일은 괜찮은 일이다.


여기에 두 여자가 있다. 80년대 학번 삼십대의 주부, 대학 시절 노동 운동에 참여하고 함께 운동하던 남자들을 만나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자들이다. 한 여자는 노동 운동을 하는 남편과 이혼하여 카페를 운영하며 산다. 다른 여자는 운동권 출신이면서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 하나를 기르며 이혼하고 혼자 가게를 경영하는 그녀의 이름은 수민이다. 좋은 집안에서 자라 어려움 없이 대학을 들어가고, 새롭게 알게 된 세상의 모순에 노동 운동에 뛰어든 80년대 학번이라면 한번쯤은 만나 보았을 그런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란 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노동 현장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함께 노동 운동을 하던 가난한 학생 출신 운동가와 결혼한다. 그녀는 평범한 삶을 꿈꾸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 하나를 낳고 이혼한다.

인실은 농부의 딸이다. 그녀가 하는 노동 운동은 그녀의 삶 자체였다. 그녀가 걸어온 인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그런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결혼과 함께 많은 걸 포기한다. 정치판에 뛰어든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는 노동 운동의 이념과 이상은 쓸데없는 것에 불과했다.

과외를 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아이들은 친정 어머니에게 맡겨 놓은 채,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걱정하며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인실의 삶이다. 그녀에게 있어 삶이란 힘들고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알콜 중독에 빠져 지내게 된다.

그녀들이 겪는 일상은 우리나라 다른 여성들이 겪는 일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남편을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삶, 대학 시절에 꿈꾸어 온 노동자가 주도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희망은 먼 과거가 되어 버린 삶, 경제적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그토록 멸시하던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하는 삶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과제이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호적에 올릴 수 없어서 이혼 상태인 남편의 호적에 아이 이름을 올려야만 하는 현실. 정치하는 남편에게 걸맞는 아내가 되기 위해 적절한 이력과 경제력을 갖추어야 하는 현실. 밥벌이를 위해서 아이들을 친정 부모에게 맡겨 둔 채 이리 저리 뛰어 다녀야 하는 현실.

어느 누가 이 두 여성을 순수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념을 토로했던 열정적인 노동 운동가로 봐 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녀들의 삶은 가슴 아프다. 답답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질서에 얽매여 대학 시절의 꿈과 이상을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기에….

"거인도, 그 거인을 필요로 했던 시대도, 거인의 커다란 걸음도, 거인의 드넓은 그림자 안에 들어 있었던 그 모든 것들도 이제 사라지고 있다.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엔 무엇이 자리를 대신하고 또한 도래할 것인가."

소설의 진행은 그녀들의 현재 삶에 대한 조명과 과거 시절에 대한 회상이 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들의 현재 삶은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돛단배와 같다. 그래서 그녀들의 삶은 위태롭고 안쓰럽다. 그들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의 등을 바라보면서 인실은 생각한다.

"저 남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스무 살 때 계급 제도와 여성의 소외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으며 서른이 넘었을 땐 가부장제 사회란 걸, 책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어떻게 몸으로 느꼈으며 지금은 당신 딸들의 미래에 대해 무엇을 보고 있냐고."

30대의 80년대 학번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져 보았을 법한 질문이 아닐까 싶다. 희망을 꿈꾸고 노동자의 세상을 부르짖던 그녀들의 삶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아이를 양육하는 문제에,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에, 여성들이 받고 있는 소외와 무관심에 짓눌려 그녀들의 꿈 많던 과거를 잊고 사는 건 아닌지.

그녀들이 대학 시절에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큰 불평등과 소외 속에 놓인 것이 80년대 학번 30대 여성들의 삶이다. 그녀들이 꿈꾸던 평등한 세상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과연 그녀들의 딸들이 성장했을 때에는 가능한 세상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것은 머나먼 미래에나 가능한 험난하고도 어려운 꿈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김연 지음, 한겨레출판(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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