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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동네. 낮에도 극 지방의 백야처럼 어둑어둑하다.
비에 젖은 동네. 낮에도 극 지방의 백야처럼 어둑어둑하다. ⓒ 전희식
농사가 될 턱이 없다.
사람도 냉기가 만병의 원인이 되듯이 작물도 마찬가지다. 습하고 차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약해진다. 약해지면 벌레가 먹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벌레가 엄청 와글거리고 병도 많아진다. 요즘 한창 수확이 시작되는 때라 하루 햇살이 아쉬운 판에 맨날 비만 뿌려대니 한숨이 절로난다. 어느 음유시인은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가을 해가 한 뼘만 더 늘어나기를 기원했다지만 오늘 나는 햇살이 우리 밭에 한 줌만 뿌려준다면 여한이 없으리라면서 욕심을 대폭 줄여 봤는데 그 마저도 허사가 되었다.

새벽이슬만 많이 와도 축축 늘어지는 들깨가지 고추가지가 날이면 날마다 내리는 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찢어지고 부러지고 쓰러졌다. 난리가 났다. 태풍이 분 것도 아닌데 저 모양이다. 현재 고추 두벌 따기를 했는데 말리다가 다 썩어 버렸다. 마당에 널었다가 처마 밑으로 옮기고 마루로 올렸다가 방으로 다시 들이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다보니 가위로 잘라 말려도 곰팡이가 스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고추밭은 일찍이 역병이 휩쓸어 버렸고 지금은 탄저병이 창궐하고 있다. 다행이 우리 고추는 아무 병도 없고 다시 빨간 고추가 많이 맺혔지만 고추를 따지 못하고 있다. 차마 건조장에 싣고 가고 싶지는 않아서이다. 단 한 포기도 병이 안 걸렸지만 뻔히 눈 뜨고 고추가 곪아 빠지는 걸 보면서도 고추를 따지 못하니 안절부절이다. 비닐하우스 건조장이라도 하나 만들까 보다.

역병으로 말라 죽은 고추. 속이 상한 임씨 아저씨는 뽑아 낼 기력도 잃고 처다 보지도 않는다.
역병으로 말라 죽은 고추. 속이 상한 임씨 아저씨는 뽑아 낼 기력도 잃고 처다 보지도 않는다. ⓒ 전희식
참깨도 예년 같으면 벤지 2~3일이면 작대기로 두드려 털 수 있으련만 벌써 베어서 처마 아래로 세워둔 지 닷새째인데 다발다발 묶은 참깨 다발 속이 썪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김장배추랑 무우를 심어 싹은 아주 기똥차게 잘 났는데 목초액을 한번 뿌리려고 하늘을 노려보며 기회만 보다가 이제는 고개가 아파서 포기하고 있다.

옛날에는 새벽에 잠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귓전을 때리는 빗소리를 만나면 얼마나 달콤했는지 모른다. 한 곡의 자장가가 되어 다시 꿀 맛 같은 잠 속으로 기어들곤 했지만 요즘은 잠이 깨면 반사적으로 창문을 열고 오늘은? 하고 날씨부터 챙긴다. 비가 와야 만사 제쳐두고 하루 쉬게 되는 꿀맛 같은 휴식이 요즘 맨 날 계속되다 보니 소주잔 놓고 뒤집을 파전도 없고 부쳐 먹을 호박도 없다. 정말 올해는 애호박을 별로 따지를 못하고 있다. 작년보다 호박을 두 세배 더 많이 심고 잘 키웠는데 벌이 날지를 못하니 수정이 안 되서 호박이 맺히지를 않는다. 탁구공 만하게 맺히는 게 보이면 ‘너 잘 만났다. 한 닷새 뒤에 내가 잡수신다’고 점 찍어 놔 보지만 어김없이 곯아빠지고 만다.

며칠 전부터 기대를 잔뜩 하고 애 호박이 따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지셨다. 사망원인은 잦은 비.
며칠 전부터 기대를 잔뜩 하고 애 호박이 따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지셨다. 사망원인은 잦은 비. ⓒ 전희식
나야 벼농사는 안 하지만 동네 분들 쌀농사 하는 사람들은 올해 쭉정이 잔치 할 거라고 말들이 많다. 벼 포기도 잘 안 벌었지만 지금은 햇볕이 등짝이 벗겨질 정도로 뜨겁게 내리 쬐어줘야 하는 데 햇살 대신 빗살만 난무하니 걱정이 클 수밖에 없다. 벼 멸구나 뜨물이 생기는지 며칠 전 해가 잠시 났을 때는 우리 동네 골짜기가 완전히 농약으로 폭격 맞은 것 같았다. 집에 있어도 천지를 진동하는 농약 냄새에 코끝이 간질거릴 지경이었다. 동네 사람 모두가 경운기를 끌고 나와서 농약을 살포하였던 것이다.

밭을 둘러보고 오다가 한씨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를 전생원이라고 부르는 한씨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일년 내내 교대로 시내 한의원에 침 맞으러 다니시는데 내 차를 이용하는 때가 많아 늘 나를 보면 반색을 하신다.

“어이 전생원 요즘 하늘은 산삼을 삶아 먹었나벼. 안 그래? 하루 쯤 쉬고 하지 맨 날 그 짓하고 있네그랴”
“하하…. 또 그 얘기예요?”

비와 상관없이 옥수수만 대풍이었다. 질소질을 자가 생산하는 콩밭 언저리고 뱅뱅 심었는데 한 그루도 탈이 없이 자라 잘 익은 옥수수.
비와 상관없이 옥수수만 대풍이었다. 질소질을 자가 생산하는 콩밭 언저리고 뱅뱅 심었는데 한 그루도 탈이 없이 자라 잘 익은 옥수수. ⓒ 전희식
나는 지레 입부터 싱글벙글 하는 한씨 할아버지 바라보는 게 여간 유쾌하지가 않다.

비 오는 거는 하늘이 땅을 덮쳐가지고 서로 흘레붙는 거라면서 ‘사람도 할 때는 소리도 나고 하잖여. 천둥치는 건 바로 그거여’ 라며 손바닥을 부딪쳐 가면서 전에 했던 설명을 다시 하는 게 그렇게 좋으신가 보다.

풀들만 신이 났다. 만판으로 무성하다. 비가 오면 하늘과 땅만 흘레붙는 게 아니고 잡초들도 그런가 보다. 번식이 놀랄 정도로 왕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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