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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상사화 ⓒ 정판수
꽃이 피기 이전의 상사화는 그 이름 대신 상사초로 불린다. 쑥·나생이·달롱개 등의 나물이 봄의 전령사로 알려졌지만 옛 선비들은 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푸른 잎을 드러내는 상사초야말로 봄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황량한 밭언저리에 떼를 짓지 않고 홀로 넓은 잎사귀를 드리우며 솟아오르는 고고한 자태가 선비들의 관심을 끌만도 했으리라.

혹시 못 본 이들을 위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면 군자란과 잎사귀와 모양은 비슷한데 그보다 조금 작고 얇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처음 이것을 본 사람들은 춘란의 일종이 아닌가 착각하기 쉽다.

다소 도도하게 오롯이 솟아난 상사초는 한 두어 달쯤 잎사귀를 달고 있다가 오월 중순 경이 되면 갑자기 없어진다. 하도 순식간에 없어지기에 아는 이로부터 얻어 처음 옮겨 심은 그해에는 누가 그것을 뽑아버렸나고 생각했다.

다시 그렇게 두 달쯤 자취 없이 있다가 여름이 되면 사라진 그 자리에 잎 없이 밋밋한 꽃대가 하나 올라오고 곧이어 꽃이 커다랗게 벙그는데 그 모양은 엄지에서 집게손가락 굵기의 민흘림기둥 형태로 우뚝 솟은 매끈한 꽃대에 진달래(연달래에 가까움) 두어 송이가 매달려 있는 형태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 모습으로 한 보름쯤 잎사귀 하나, 잔가지 하나 없이 민둥꽃대에 처연한 자태로 서 있다가 다시 꽃대와 꽃은 없어지고 잎이 나온다.

이제 왜 이 풀을 혹은 이 꽃을 상사초, 상사화로 부르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반드시 잎이 지고 난 뒤 꽃이 피며, 꽃이 필 때는 잎은 없고 달랑 꽃대 하나만 있다. 그러므로 잎과 꽃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다.

잎은 꽃을 그리워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사라져야 하고, 꽃도 잎을 보고자 하나 잎이 피기 전에 떨어져야 하니까. 그래서 둘은 무한정 애틋하게 그리워만 하다가 서로 보지 못하고 끝나버리기에 상사초 혹은 상사화로 불리운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이런 관계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척 사랑하지만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소설 같은 한 쌍을. 그런 짝은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얘기이겠지만 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만날 수 있다.

이십 년이 다 돼 가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많은 이들이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또 얼마 전 발표처럼 평양으로 가는 육로여행이 실행되면 더욱 수월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 수는 전체 이산가족에 비해서 극소수다. 아직도 상사초, 상사화처럼 만나지 못하고 애태우는 이들이 많다. 아니 살아 생전에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끝나버릴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산가족에게만 국한할 게 아니라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바라보자. 앞 정권에서 닦아놓은 '햇볕정책'의 기반에다 진보적이라 평을 듣던 이가 정권을 잡자 '이번에는 곧 이루지겠구나' 하는 기대가 대통령이 미국 한 번 갔다 오면서 끝나버렸다.

이 틈을 타 수구 세력들의 난리가 여간 난리가 아니다. 그들에게 북한은 북한(北韓)이 아니라 여전히 북괴(北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원수도 그렇게 철천지원수로 여길까.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고 느끼던 통일의 길이 오히려 뒷걸음치며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나는 잠시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 있는 상사화 뿌리를 생각해 본다. 이제 얼마 뒤면 우리 밭에서 상사화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풀도 꽃도 없는 그 자리만 휑하니 남을 것이다. 그런데 그 텅 빈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다. 상사초 혹은 상사화가 잎을 드리울 때에도, 꽃을 피울 때에도, 둘 다 없을 때도 뿌리는 늘 그 자리에 의연히 버티고 있었다.

즉,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을 때에는 뿌리 속에서 서로 만나고 있으며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동안 둘은 뿌리를 통하여 더욱 진득한 만남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드러나는 것만을 결실로 여기는 데서 우리의 허무는 더해진다는 것을. 진실로 알찬 열매는 시나브로 우리 몸 속에 배어든다는 것을.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통일 열망이 식지 않는 한 꼭 이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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