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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저희 집에 둘째 큰아버님께서 잠시 머물고 가셨을 때 지팡이에 의지하고 계신 모습을 뵙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둘째 큰아버님 모습에서 환갑을 갓 넘기고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모습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올해 연세가 여든 여섯이시지만 전에 뵈었을 때는 그래도 다리를 절룩거리실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희 아버지 생전에 '큰 아버지나 둘째 큰아버지 역시 다 같은 아버지이시다'라고 하셨듯이 둘째 큰아버님 역시 저희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올리듯이 당돌한 조카가 죄송한 몇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에게 호되게 회초리 맞을 각오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큰아버님 살아 생전에 꼭 한번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피 끓는 조선 청년으로 혈혈단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입대했던 둘째 큰아버님, 일제가 강점해 있던 조국 해방전선에 침투하기 위해 OSS 특수훈련을 받으셨던 둘째 큰아버님, 저는 자라면서 이런 사실만으로 충분히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둘째 큰아버지께서는 광복군 출신이면서 민족전쟁 와중에 인민군의 폭격으로 강보에 싸인 첫째 사촌 형을 잃고 잠시 우익에 가담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좌익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계신지요? 아직까지도 좌익에 가담하셨던 큰 아버님을 원망하고 계신지요? 저는 얼마 전 둘째 큰아버님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을 때 언뜻언뜻 느꼈습니다.

큰 아버님의 과거에 대해 이미 화해하신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둘째 큰아버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도 그 어떤 원망과 갈등의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함부로 잘못 판단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면 단위에서 인민위원장까지 지내셨다는 큰아버님의 좌익 전과로 인해 우리 집안이 많은 고통과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저도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큰아버님 개인적으로도 그런 형님 때문에 큰 뜻을 펼치지 못하셨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님과 둘째 큰아버님의 다툼을 수 없이 보고 자랐습니다. 명절 때나 제사 때가 되면 으레 두 분께서 다투셨으니까요. 어려서는 두 분께서 왜 그렇게 언성을 높이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게 좌우익 사상 문제라는 것을 다 커서 알았습니다.

해방 후, 일제 앞잡이들이 많았던 우익에 비해 좌익 진영에 양심적인 분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언젠가 둘째 큰아버님께서도 인정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과 가장 가까운 형님을 인정하지 않으셨는지요.

존경하는 둘째 큰아버님, 육이오 민족전쟁 때 몇몇 '좌익분자'들을 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고향에서 인민군이 후퇴하던 도중 몇몇 '우익분자'들을 총살시키려 했던 것을 살려준 사람이 바로 큰아버님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좌우로 세상이 뒤바뀔 때도 두 분 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남한 땅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던 분은 바로 큰아버님이셨습니다. 오랜 도피 생활,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산골짜기에서 세상과 등지고 살다시피하셨으니까요.

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광복군 출신의 둘째 큰아버님만큼은 아니지만 큰아버님의 그런 행적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사람을 살렸던 큰아버님 또한 존경하고 있습니다.

인민위원장을 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생활하셨던 큰아버님,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분명 큰아버님께서는 그 살벌한 시절에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을 것이리라 짐작해봅니다. 평소 산과 사람을 좋아하셨던 큰아버님 인품을 믿어 짐작하건대 분명 그러하셨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두 분은 사상문제만 나오면 제사 때나 명절 때마다 서로 언성을 높이셨고 저희 아버지는 그 틈에서 술잔만 기울이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다투셨습니다.

그런 형님들의 다툼 속에서 저희 아버지는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큰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다툼이 계속되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집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집불통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두 살 터울인 바로 위 형이 몹시도 괴로움을 당했을 것입니다. 저는 예의 그 고집통머리를 내세워 늘 형에게 덤벼들었으니까요.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동생 놈이 형에게 덤빈다고, 형이라는 놈이 동생을 너그럽게 보살피지 못한다고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들에게 단 한 번도 함부로 머리통을 쥐어박거나 뺨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회초리를 드셨습니다. 한번 회초리를 드시면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리셨습니다. 여름철에는 반바지를 입고 밖에 나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아버지는 형제들간에 싸우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학업 성적이 아무리 떨어져도 별 말이 없으셨지만 형제들간에 싸우는 것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식들의 가장 큰 죄목은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형제간의 싸움을 가장 큰 죄목으로 꼽았던 이유는 바로 큰아버님과 둘째 큰아버님의 싸움을 죽도록 싫어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걸 자식들에게 되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저는 둘째 큰아버님께서 큰아버님으로 인해 짊어져야 했던 고통의 깊이를 잘 모릅니다. 그로 인해 원망이 얼마나 깊이 박히게 되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짐작컨대 저는 그러리라 믿고 있습니다. 지하에 계신 큰아버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분 형님들의 화해를 그토록 바라셨던 저희 아버지 역시 그러리라 믿습니다. 둘째 큰아버님께서 이제 큰아버님에 대한 원망의 끈을 놓으시길 간절히 원하고 계실 거라는 것을요.

둘째 큰아버님! 저에게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광복군이십니다. 아직도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버젓하게 내세우고 살아가는 일제 앞잡이 매국노들, 그리고 그 자손들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남한 땅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광복군의 조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습니다. 혹여 사상문제로 큰아버님에 대한 원망이 남아 계신다면 이제 그 원망의 끈을 놓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라며 당돌한 조카를 용서해주십시오. 공개적인 편지로 인해 집안에 누가 되었다면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좌우익 사상문제는 당신 시대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전히 저희들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몇 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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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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