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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순이 아줌마 김기영 사장
또순이 아줌마 김기영 사장 ⓒ 권윤영
‘허물은 촐랑거리는데서 시작되고 죄는 조급한 마음을 참지 못해서 생기며 눈을 조심하여 남의 추한 모습을 보지 말고 밝고 아름다운 것만 볼 것이며 입을 조심하여 실없는 말, 거짓말, 남을 비방하는 말 하지 말고….’

8평 남짓한 공간. 놓여진 테이블 3개. 한쪽 벽에 적힌 ‘또순이 아줌마가 알려드리는 글’이 눈길을 잡아끄는 대전시 선화동에 위치한 선화식당.

“우리 집 부대찌개가 제일 맛있어.”
“얼굴을 보니 애기는 시집을 늦게 가야겠네.”

식당 사장인 또순이 아줌마 김기영(54)씨는 식당을 찾는 손님에게 다정스레 인사를 건네며 구수한 입담으로 내친 김에 관상까지 봐준다.

“내가 여기 식당을 지난 93년부터 시작했지. 노점을 10여년간 해오다 내 가게를 갖게 됐어. 작은 공간이지만 그 기쁨은 말 할 수 없이 컸어. 이렇게 쳐다보고 저렇게 쳐다보고 눈물은 또 왜 그렇게 나던지.”

그녀는 그동안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인생사를 구구절절 풀어놨다.

“그동안 한 고생을 얘기하면 뭐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거지. 내 인생을 드라마로 만든다면 단막극 갖고는 안돼.”

김씨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가난은 어린시절 그녀의 꼬리표였다.

“15살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똥도 펐어. 고생만 하고 너무 힘드니까 스님 되려고 절에도 갔었지. 그 당시부터 관절이 안 좋아서 지금까지 고생이야.”

식당 종업원을 5년간 하다가 36살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식당을 시작했지만 곧 집도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 이후 입에 풀칠하기 위해 노점상을 시작했다. 떡, 아이스크림, 호떡, 번데기, 홍합, 냉차 등등. 안 해 본 품목이 없을 정도.

“몸도 좋지 않은데 무거운 짐을 이고 하루 종일 다리품을 팔아도 매출이 없는 날이 허다했어. 떡을 이고 대전서 대천까지 갔는데 떡이 다 시었더라고. 커피를 팔 땐 5시간 동안 한잔도 못 팔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허탕 친 날이면 왜 그리 서럽던지 눈물이 펑펑 쏟아졌지.”

딸을 낳고 3일 만에 냉차 장사를 나가기도 했던 또순이 아줌마. 약 먹고 죽을 결심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죽을 용기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마지막에 했던 ‘오방떡’ 장사가 다행히 장사가 잘 돼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것.

한쪽 벽에 적어 놓은 글귀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한쪽 벽에 적어 놓은 글귀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 권윤영
“나는 왜 복이 없을까 이런 생각 많이 했었어. 내가 한 고생을 다른 사람은 덜 하게 해주려고 손님들에게 사주관상을 봐주는 거야. 절에 다니면서 기도하다보니 관세음보살에도 도통해서 관상도 보게 되고 스님들 어깨 너머로 육십갑자 짓는 것도 배웠거든.”

몸이 좋지 않아도 한 푼이라도 아껴야한다는 생각에 병원에도 안 간다는 또순이 아줌마는 알코올 중독 때문에 요양소에 있는 남동생과 남동생의 아들까지 돌보고 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남동생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식당을 그만둘 생각이란다.

“수세미, 고무, 볼펜장사가 오면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밥도 다 해줘. 앞으로 좋은 일 많이 하고 싶어.”

“또순이라는 별명? 22살 때 사람들이 일 잘한다고 붙여줬어.”

세상사.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웃을 날이 온다는 것을 또순이 아줌마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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