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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한다. 자식의 효도보다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더 깊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을 살펴보면 자식에게 지고 마는 부모의 실추된 권위도 분명 한 몫을 하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의 지도를 거역하고 제멋대로 된 아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 그 사회와 그 나라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교육하면 지식 습득만을 우선시하고 있다. 지식은 조금 부족하여도 자신을 망치거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성이 잘못되면 일생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만다.

특히 초등 교육은 뿌리를 내리는 것이므로 무엇하나 대수롭게 여기거나 간과해서는 안된다.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이나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는 깨우침을 상기해보자.

청소년 문제는 수 천년 전에도 심각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범 국가적으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연구되고 공교육의 책임이 더욱 요구되는 이 때에 우리의 초등 교과서를 보면 그런 기대에 역행하는 가르침이 버젓이 실시되고 있어 지적하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80쪽 <반대로만 하는 아들>은 부자간의 잘못을 당연한 것처럼 배우도록 하고 있다. 아직 철모르는 감수성 예민한 초등 4학년 시기에 이런 잘못을 은연중에 가르치는 것은 실로 위험한 교육이다.

옛 교과서에서는 청개구리 우화로 이야기 삼았었는데, 이번에는 보다 구체성을 띤 고학년의 교육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교과서 여기저기에 이런 잘못이 7차 교육과정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된 모습이라는데 심각한 문제 아닐 수 없다. 선진 교육만이 세계화며 경쟁력이라고 외치면서 판단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초등 4학년들에게 이런 수준의 교육을 하고 있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읽기 교과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옛날,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무엇이든 반대로만 하였습니다.
"강물은 냄새가 나니까 샘물을 길어 오너라." 하고 아버지가 말하면, 아들은 "아니에요, 강물이 더 좋아요." 하며 강물을 길어 왔습니다.

아버지는 반대로만 하는 아들 때문에 늘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차츰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반대로만 하는 아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하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을 때에는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시원한 물을 가져왔습니다. 샘물을 마시고 싶으면 강물을 길어 오라고 하였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채소를 먹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웃 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고 뚫린 듯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강가에 도착하여 보니,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물이 좀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아버지는 겁쟁이예요."
"네 생각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가 앞서 강을 건널 테니 따라오도록 하여라."

아버지는 거친 물살을 헤치며 간신히 강을 건넜습니다.

"얘야, 조심하여라. 물거품이 세게 이는 곳은 발을 디디지 않도록 하여라. 그 곳은 바닥이 깊이 파여 있단다."

아버지는 너무 급한 나머지 반대로 말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물거품이 세게 이는 곳에 다다르자, 아들이 발을 내디뎠습니다. 아들은 곧 물살에 휩쓸렸습니다.

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마을 사람들이 강가로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이미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 뒤라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아들이 죽고 만다는 가르침의 뜻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겁쟁이라고 매도하는 표현은 지나쳤으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편애를 부린 참담한 결과를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은 교육상 현명한 방법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어리석음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결코 개인의 문제일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우행에 대한 연구는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깨우쳐져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의 어디에도 어리석음의 실체에 대한 파악이나 연구가 보이질 않는다. 배운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반대로만 하던 아들이 죽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식이었다.

아무리 정의를 주장하더라도 억지를 부리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글은 억지 비유를 하다보니 현실성이 무시된 황당한 내용이 되었으며, 아들이 죽고 만다는 여운으로 꿈나무들의 뇌리에 공포 분위기를 남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았나 걱정된다.

'아들은 무엇이든 반대로만 하였습니다' 고 했는데 처음부터 반대로만 할 수는 없다. 처음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것이다. 아들이 반대로만 한다고 반대로만 의사를 소통한 아버지의 태도는 온당한 것인가? 아버지로써의 책임과 도리를 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불의를 보고도 바로잡는 어른이 없는 현실과 너무도 똑같다. 자식은 아버지의 발자국을 밟으며 걸어간다고 한다. 아버지가 비척거리며 걸어가면 그 발자국을 따라가는 아들의 걸음도 비척거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어른이 어른의 역할이나 도리를 다하지 않는 나라는 절대로 바로 서지 않는다. 아들이 반대로만 하니까 결국 아버지가 지고 만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가르침이나 교과서의 교육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되며 나아가선 거역하는 아들의 불의를 용납하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거역할 수도 있다는 그런 공부를 공교육으로 배우고 자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하나 뿐인 내 아들은 특별하니까 집에서 그렇게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아버지는 급한 나머지 반대로 말해야 하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물거품이 세게 이는 곳에 다다르자, 아들이 발을 내디뎠습니다. 아들은 곧 물살에 휩쓸렸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아들이 이미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 뒤라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로 맺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면 자연적으로 망연자실 후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

아버지의 탓으로(잘못으로) 아들이 죽고 만다는 내용은 틀림없는 오류다. 이러한 오류를 가지고 깨달음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은 어거지다. 설사 그것이 바르게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하더라도 억지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우리의 정서에는 지금까지 그런 식이 통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에서는 통할 리가 없다. 7차 교육 과정은 우리끼리의 지혜가 아니라 세계 속의 지혜여야 만 한다.

가르침을 주는 교육이 되게 하려면 아들이 반대로만 하는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아들의 입장과 아버지의 견해가 토의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나 원인이 무엇일까?'를 밝혀보는 토론을 곁들이도록 하였다면 조금이라도 나았을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이 부모 말씀에 순종하는 방법론이나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는 지혜가 모색되도록 한다면 그나마 현명한 교육이 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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