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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최명희 선생
생전의 최명희 선생 ⓒ 혼불 기념사업회
최명희 선생.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나는 왠지 가슴이 얼얼하다. 1947년생.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돼지띠. 진작 알고 지냈더라면 서로 친구하였을 연배의 이이에게 나는 선생이라는 경칭(敬稱)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작가를 여성이라는 점에서 다르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작가의 이름 앞에 굳이 여류(女流)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나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특별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작가 최명희 선생은 그이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떠나서 다만, 한 사람의 걸출(傑出)한 작가요, 출중(出衆)한 이야기꾼인 것이다.

하기야, 소설 <혼불>을 두드러지게 하는 요인의 하나인 섬세한 문장이라든지 우리말 고유의 가락, 그에 따르는 깊은 울림들은 무엇이든 곱고 아름답게 갈고 다듬는 일에 남성들 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할 듯한 여성적 세련미의 산물(産物)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선생은 1980년 봄 4월부터 <혼불>의 첫 장을 쓰기 시작하여 1996년 12월에 이르기까지 만 17년간 애오라지 이의 집필에 투혼(鬪魂)하다 마침내 <혼불> 제5부 10권을 내 놓고 홀연(忽然)히 세상을 떠나갔다.

<혼불>에 혼을 쏟아 붓느라 이녁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암(癌)과의 싸움을 뒤로 미룬 탓이라니, 선생은 아마도 이 <혼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소진(消盡)시켜 버렸나 보다.

<혼불>말고도 다른 작품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어쩌면 선생은 <혼불>을 위하여 이 세상을 다녀간 게 아닌가 모를 일이다.

“재사(才士)와 가인(佳人)은 단명(短命) 박복(薄福)하다더니, 그 어른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보다.” ('혼불' 제 1부 1권 233쪽)

어쩌면 작가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미리 내다보고 적은 것이 아닌가 싶은 위 인용문에서의 그 어른은 소설 <혼불> 속의 청암부인 시댁 윗대 할머니시다.

꽃다운 나이 스물 하나에 매안의 이씨 문중으로 시집을 왔으나, 불행히도 신랑은 홍역을 치르다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망부의 제사를 마치자마자 이승에서 못다 한 부부의 인연을 내생(來生)에서나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마침내 장문의 유서를 남겨 놓고 자진(自盡)을 하신 어른.

가슴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고, 글을 배워 문장에 능하였으며, 여인의 할 일로 침선(針線)을 가까이 하여 바느질에 날렵한 솜씨를 자랑하였다는 그 어른을 두고 회상하는 이 대목이 막 답사 길에 오르는 내 가슴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아, 선생은 여기 이렇게 누워 있구나!

답사의 첫 행선지는 당연히 작가의 묘소로 잡았다.
장마 끝에 잠시 햇살을 내민 서늘한 여름 아침 8시, 아내와 함께 양산의 집을 나서서 9시 30분 부산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시간대에는 우등버스만 운행하여서 버스요금이 한 사람에 자그마치 1만9100원. 서울 가는 것 맞먹는 요금이다.

부산서 전주행이 60분 간격이어서,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요기 거리도 준비 못하고 급히 차에 오르고는 중간 휴게소에서 겨우 멀건 우동 한 그릇으로 시장기를 때웠다. 1인분 2500원.

4시간 반가량이 걸려 도착한 전주는 비 올 것이라 짐작하고 준비한 비옷이 무색하게도 쨍쨍하게 더웠다.

두어 해 전에 혼불 홈페이지에서, 최명희 선생 묘소에 비석이 없어서 찾기가 힘들다는 어느 네티즌의 글을 읽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선 전주시 관광과에 전화부터 했다.

혼불 문학공원 가는 길
혼불 문학공원 가는 길 ⓒ 혼불 기념사업회
전화 세 통화에 세 사람과 연결해서 정리해보니, 고속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어린이 회관을 가자고 해서, 어린이 회관 접어들기 전에 동물원 가는 길로 70-80미터쯤 내려가면 길 왼쪽에 '최명희 선생 묘소' 표지가 있고, 그 맞은편 숲길로 들어가면 보이는 무덤 한기가 바로 그 곳이란 얘기였다. '혼불'이나 최명희 선생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택시기사를 우리가 안내해서, 긴가민가하며 내린 곳에 찾던 묘소표지판 보다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꽤 커다란 바위에 [혼불 문학공원]이라 새겨진 표석이었다.

혼불 문학공원 전경
혼불 문학공원 전경 ⓒ 전영준
'드디어 찾았구나!'
택시로 오는 동안에도 길가는 행인이나 길가의 상점에 물어 보기를 몇 차례나 거듭한 끝에 겨우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전주에서 최명희라는 이름과 소설 '혼불'에 대해 어찌 이리도 깜깜할까 싶어 지청구를 했었는데, 이제 [혼불 문학공원]이라는 표석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묘지로 가는 길바닥은 나무로 깔아 놓아 발걸음에 전해 오는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했다.

묘비가 세워져 있지 않다는 말과는 달리 고인의 처소에는 단아한 비석 하나가 유택을 지키고 서 있다. 뿐만 아니라 스무 살쯤 되는 시절의 얼굴 조각상이 하늘을 보고 있다. 아내는 손수건을 꺼내 마치 세수라도 시키는 양, 조심스레 선생의 얼굴을 닦아냈다.

'아, 이이는 여기, 이렇게 누워 있구나!'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조그만 풀밭에 오뚝한 봉분을 안고서, 선생은 그렇게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두고 간 조화바구니가 쓸쓸하다. 조문의례에 밝지 못한 우리 부부는 사들고 간 캔식혜와 초코칩 한 봉지를 펼쳐 놓고 묵념을 했다.

"최명희 선생님. 먼 곳에서 당신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내가 산 사람 앞에라도 선 것처럼 인사말을 한다. 좀더 머무르며 속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금방 발길을 돌리려한다. 도시 속의 공원 같지 않게 너무도 괴괴한 적막감과 매미들이 통곡을 하는 양 떼 지어 울부짖는 것이 마치 최명희 선생과 그의 영계의 친구들의 혼불 같다는 착각이 들어 언뜻 무섬증이 든단다.

“이제 '혼불마을'로 갑니다”는 아내의 작별인사를 남겨두고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여 그곳을 총총히 떠나왔다. 치우지 않고 묘 앞에 그대로 두고 온 식혜깡통과 과자봉지가 쓰레기가 될 것 같아서 오는 도중 내내 마음에 걸렸다.

묘소가 전북대 가는 부근이고 어린이 회관, 동물원도 그 인근이라는데 일반버스는 더물고 택시도 구경할 수가 없어서 결국 지나가는 승용차를 얻어 타고 큰길까지 나와 택시로 시외버스 터미널엘 갔다. 전주에서 남원 가는 길이 시외버스로 약 20분, 일인당 차 삯이 4100원이다.

춘향의 고장, 남원을 거쳐

남원이 더 남쪽에 있어서, 부산서 왔던 길로 다시 얼마간 달려, '춘향의 고장' 남원에 닿았다. 시각은 오후 3시. 곧바로 '혼불마을'로 들어가려는 급한 내 마음을 잡고 아내가 여기서 묵고 가자고 했다. 시원찮은 몸으로 출발한 나는 마음뿐이지 벌써 지쳐 있었기에 요기보다도 먼저 쉬기로 했다.

꾀죄죄한 터미널 부근을 피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강이 보이는 곳에 '코아장'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일박에 25000원인데 비해 꽤나 깨끗하고 전망 좋은 5층 여관이었다. 끈적이는 몸을 씻고 조금 쉬고 나니 5시,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각이라서 그곳에서 가깝다는 광한루를 다녀와서 저녁 먹고는 곧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춘향의 무덤이 있다는 강 건너 산의 육모정이 보이는 코아장 305호에 아내와 나의 지친 몸을 뉘이게 된 것이다. 무리했던 탓이었던지 아내는 밤새 끙끙대고, 바뀐 잠자리에 쉬이 적응 못하는 나도 낯선 남원의 밤을 마냥 뒤척이기만 했다.

영 못 일어 날 것만 같았는데 취재여행이라는 목적의식 때문인지 날이 밝으니 아내도 나도 저절로 몸이 일으켜 졌다. 우유로 아침을 대충 때우고 아침 9시경 여관을 나섰다.

우리가 가려는 '혼불마을'은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이고, 남원역에서 시외버스가 있다고 해서 택시로 남원역엘 갔다. 기본요금, 가까운 거리였던가 보다.

드디어 '혼불마을'

좀 더 철저히 알겠다고 길 옆 여행사에 물어보니, 노봉마을로 갈 것이 아니고 매안리 가는 버스를 타라고 해서, 매안은 소설 속의 지명이고 지금은 그 곳이 노봉마을이라고 알고 있던 나는 잠시 헷갈렸다. 아내와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대의 버스가 나타났다.

그런데 행선지 표시에 노봉도 매안도 보이지 않아 또 헷갈리고 있는 사이에 그만 버스가 휑하니 떠나 버렸다. 어마지두에 물어보지도 못하고 버스를 놓치고 만 것이다.

또 다시 입씨름. 보다 못한 옆의 아주머니가 참견하기를 "사매로 가서 노봉으로 가라"고 일러 준다. 11시에 다시 버스 한 대.

'에라, 타고 보자'하고 일단 버스를 탔으나 매안 가는지, 사매 가는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조바심 태우는 것을 본 내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실은 노봉으로 갈려다 차를 놓쳤다고 하니 이 차가 바로 노봉가는 차라고 해서 속으로 '아이구, 다행이다'하며 쾌재를 불렀다. 지나칠까 걱정되어 자주 물었더니 종점이란다.

'서도역' '인화' '율촌' 등의 소설 속 지명들이 눈에 띄는 것이 신기해서 뒷자리의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서로가 단번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귀에 익지 않은 억양과 사투리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대강 알아들은 양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어느새 종점에 다달았다. 다음 버스는 4시라며 우리를 노인회관이 있는 마을 입구에 부려두고 버스는 서둘러 가 버렸다.

혼불마을 장승
혼불마을 장승 ⓒ 전영준
혼불마을 표석
혼불마을 표석 ⓒ 전영준
崔明姬 문학비
崔明姬 문학비 ⓒ 전영준
마을 들목에 '혼불마을'임을 알리는 껑충한 키의 장승 한 쌍과 '혼불마을'이란 돌비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찾던 곳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산 쪽으로 난 시멘트 길을 올라가니 '중뜸'이란 표석있는 곳에서 두 갈래 길이 나왔지만 '원뜸'은 분명 산 아랫마을이겠거니 하고 소신있게 오른쪽 길로 올랐다. 모두가 논일을 나갔는지 인적은 없고 난데없이 집 지키는 개들이 짖어서 고요를 흔들어 놓았다.

'원뜸' 부근으로 옛 그대로의 퇴락한 기와집들과 현대식 벽돌집들이 섞여 있었고, 길 막바지 산자락에 음전히 앉아있는 기와집의 솟을대문이 덩그렇게 문이 열린 채 서 있었다. 왼쪽의 낮은 슬라브집이 구색에 맞지 않아 보였다.

'원뜸'의 이씨 종가 댁으로, 청암부인과 그 자손들과 며느리들이 살았다고, 소설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지.

종가댁 솟을대문
종가댁 솟을대문 ⓒ 전영준
열려진 대문을 지나니 푸른 잔디와 정원수들이 잘 손질되어 있고, 오른쪽으로 옛날에 연못도 있었는지 연도 수북이 자라있었다. 대문 옆으로 행랑채인 것 같은 낡은 방은 잠겨 있고 인적은 없었다. 우리는 쭈뼛쭈뼛 중문을 넘어섰다.

오른쪽으로 광 같은 곳이 보이고, 왼쪽으로 사랑채였을 것 같은 건물은 잠겨 있고 마루를 낀 두 칸 방의 안채가 우리를 사부재기 보고 있는 것이 마치 사람 살지 않는 곳 같았지만, 안채 부엌 앞마당에 다른 시대에서 잘못 가져다 놓은 것 같은 쇠붙이 수도꼭지와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빨랫줄의 흰 치마저고리를 보고는 비로소 사람이 사는 곳 인줄을 깨닫고 인기척을 했다.

안쪽에서 들릴 듯 말 듯 기척이 나더니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낡은 창호지의 방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사람을 반기는 눈치가 아닌 듯해서 행여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이곳까지 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자, 그제야 엷은 미소를 띠시며 잠시 방안으로 들어가셔서는 뭔가 부스럭거리시더니 웬 신문쪽지를 가져 나오셔서 넌지시 건네주신다.

엉거주춤 마루에 걸터앉으며 신문쪽지를 받아 펼쳐 보니, [소설 <혼불> 실제주인공 '효원' 있다]는 제호의 2000년 8월 14일자 '스포츠서울'의 기사였다. 바로 우리 앞의 이 할머니 얼굴이 나와 있는 신문기사였던 것이다.

"이태 전에 기전여고 교감이 기자 두 사람을 데려와서 사진 찍기 싫다고 했는데도, 아 이리 신문에 내었네"

85세의 할머니는 단아한 자태로 소설 속의 젊은 '효원'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당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말씨에서 풍기는 기품은 '효원'을 연상시켰다. 소설과는 달리 네 자녀를 두었고, 이씨가 아니고 삭녕 최씨 가문의 손부 박증순 할머니로서, 자녀 중에는 서울 의대 내과 과장 최강원 교수와 민주당 최영희 의원도 있다는 것을 할머니와의 대화 중에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잘 기르셨냐고 여쭈었더니, "아이들이 지 스스로 공부하려고 해서 되었지 지금처럼 과외다 뭐다 억지로 시켜서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뭐 한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고개를 돌려보니 중뜰 담 곁에서 막 꽃잎을 여는 한 무더기의 분홍빛 꽃들이 나보란 듯 살며시 웃고 있다. 꽃들에 눈길을 주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할머니는 백일홍이라고 일러 주시면서 가을까지 세 차례나 피고 진다고 일러준다.

85세의 노인 같지 않게 총기가 생생하다. 우리 점심식사도 염려하시고 내려 갈 버스가 늦게 올 것인데 어찌하느냐며 걱정이시다. 식사는 혼자서 손수 해 드시고 그 외 다른 일은 마을 사람 들이 거들어 준다고 하신다. 마당에 장작이 수북이 쌓였기에 아직도 장작 때시는 가 여쭈었더니 작은 방 쪽으로는 지금도 장작으로 군불을 때신단다.

사당은 어디 있는지 궁금해 하니 6.25 후에 사당도 다 없애고 노비들도 다 풀어주었다고 대답하신다. '안 그러면 노비들이 사람을 해친다고 해서…' 하고 입속말로 중얼거리신다.

남편 강모(소설 속 이름)는 어떻게 됐냐니까 전쟁 때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이 자신 없게 들려서 혹 사촌(강태)과 함께 북으로 갔을 수도 있으니 다음 이산가족 상봉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고 하자 이제 다 잊은 사람이라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시할머니 청암부인은 실제로 그 택호를 썼고 지금 북쪽 선산에 유택이 있단다. 선산 돌보는 일을 당신이 했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 아들네에서 얼마 있다가도 이 집 관리 때문에 여기 내려와서 머무르게 된단다.

아내는 끝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강실에 대해 물어보고 말았다. 강실은 이 할머니, 곧 효원의 남편인 강모의 사촌 여동생으로 소설 속에서 두 오누이가 상피를 붙게 되면서 이 마을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되고 이 가문의 당당한 위세도 꺾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강실은 실은 내 시누이가 아니고 계집종의 이름이야. 소설에서 재미있으라고 꾸며낸 이야기지"

'하기야 소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가문의 치부를 곧이곧대로 수긍할리야 없을 테지……'

최명희 선생 묘소에 다녀왔다고 하자, 참 정성도 지극하다고 하시며 "풀이 무성하지는 않더냐"고 걱정하신다.

처음 얼마 동안은 비석도 세우지 못했는데 남원의 노봉마을로 이장해야 된다는 이곳 사람들의 주장과 전주시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맞서 한동안 실랑이가 오갔다고 묻지도 않는 말씀까지 하신다.

'아! 그랬었구나' 그러고 보니 딴은 '혼불마을'인 이곳이 고인이 잠들기에 더 알맞은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선생은 원래 이 마을에 살다가 전주로 갔다)

어쨌거나 그동안 산 사람들의 분분한 시비 때문에 고인의 넋도 꽤나 심란했으리라 싶다.

방문에 대한 아무런 답례품도 준비하지 못한 민망함에 요기하려고 지니고 갔던 빵 봉지를 내밀며 간식하시라고 드리니 한참 사양하시다가 끝내 받아주셨다. 뭔가 그대로 일어서 나오기 아쉬운 미진함을 떨치고 집 옆에 있다는 청호 저수지를 찾아 나섰다. 고추밭에는 푸른 고추들이 대롱대롱 달렸고 감나무도 밤나무도 한참 푸르르 가고 있었다.

소설 속의 청호 저수지와는 달리, 작고 흐린 못이었지만(저수지 속의 조개 바위는 전쟁 후에 파내었다고 함) 당시 여자인 청암부인의 힘으로 그 역사를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싶었다.

차 시간이 2시간도 좋이 남았으나 할 일도 별로 없는데다 더워도 식힐 겸, 조합 창고 뒤 언덕에 있는 정자로 올랐다. 이름 없는 이 낡은 정자조차도 이 마을의 옛 숨결과 품격을 알려주는 양 했다.

정자 위쪽으로 몇 기의 묘가 있는 산소가 보였는데 마침 그 곳에 오른 할아버지로부터 최씨 선산이란 얘길 듣고는, 아내는 지쳐서 쉬고 나 혼자 올라가 선인들의 유택을 둘러보고 왔다.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네가 이 고을에 사는 삭녕 최씨 작은댁이라 해서, 아내는 다시 '강모'에 대해 물어 보았다.

만주에서 내려온 '강모'는 전쟁 직후 국군 정보원 계통의 일을 했는데, 인민군이 내려와서 호성암 암자에 숨어 있는 국군들을 죽이고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서, 그 때는 살기 위해서 인민군의 군인 징집하는 일을 했다 한다. 그 뒤 다시 국군이 들어 왔을 때 인민군에 부역했던 많은 사람들이 뒷산 금광굴에 숨었다가 죽게 되었는데 그때 죽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랬구나,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사람을 이리 죽이고 저리 죽였다지. 여기도 역사의 피해자들이 많았구나.'

이번 추석에도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지 싶은데, 비극적 역사의 한을 안고 불귀의 객이 된 그 많은 혼령들은 오늘도 구천의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

[귀갓길의 단상] 역사의 갈피에 내 흔적은……

무작정 정자에서만 노닐 수 없어 따가운 한 여름 햇살을 머리에 이고 아내와 내가 '아래뜸' 쪽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때맞춰 노봉마을로 택시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흥정을 잘해 5000원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까지 덤으로 얹어 남원에 당도했다.

조금 전 정자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혼불마을' 조성을 위해 시에서 4700만원이 나왔다고 그랬는데,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이 세워지면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또 마을의 수익도 생기겠지만 지금 노봉마을이 지니고 있는 그 만큼의 예스러움조차도 잃게 되지나 않을는지 적이 걱정하고 계셨다.

이제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만 남았다. 내일부터는 또 바쁜 일상의 나날에 파묻히는 생활인이 되어야 겠지? 앞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곧 역사가 되었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또한 후세들에게 어떤 역사를 물려주게 될까? 그리고 이 역사의 갈피에 내 흔적은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오후 4시, 남원발 부산행 직통버스에 몸을 싣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더니 버스는 어느새 부산에 당도했다. 이른 저녁 7시.

길이 막혀 예정보다 조금 늦었단다. 다 큰 아이들이라도 출타했다 돌아오는 어른들의 손을 쳐다 볼까봐 터미널에서 아이들 숫자에 맞춰 몇 가지 군것질거리를 사서는 집으로 가는 발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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