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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표 <구멍가게> 표지
ⓒ 삼진기획
"이 책을 펴냈을 때 제일 먼저 부모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책 제목을 보시더니 휙 돌아앉으시더군요. 아마도 부모님께서는 힘겹고 고달팠던 그때 그 시절을 기억조차 하기 싫으셨던가 봐요. 저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1990년 불혹의 나이로 글동네에 첫 발을 내디딘 동화작가 정근표(51)씨가 구멍가게를 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 자전적 첫 에세이집 <구멍가게>(삼진기획)를 펴냈다.

그래. 구멍가게란 단어만 떠올려도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리고 소 눈망울만한 눈깔사탕과 퍼머를 한 머리카락처럼 꼬불꼬불하면서도 고소했던 뽀빠이, 그냥 먹기가 아까워 물에 불려서 먹었던 부푼 건빵 등이 흑백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착지근한 막걸리 내음이 난다. 김산집 딸내미(딸)가 올 가실(가을)에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 박산집 누렁이가 새끼를 열 마리나 낳았다는 이야기, 서산집 쌀독이 비었다는 이야기, 오산집 아들이 독사에 물려 죽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 등이 막걸리 잔이 돌 때마다 왁자지껄하게 묻어나온다.

그랬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마을마다 지킴이처럼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 구멍가게는 요즈음처럼 문방구와 식당, 주점 등으로 분리되어 있는 그런 구멍만한 가게가 아니라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말 그대로 만물상회였다. 또한 어른들에게는 여러 가지 정담을 나누는 사랑방 역할까지 했다.

대구에 있는 동산의료원에서 각종 의료장비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동화작가 정근표씨가 펴낸 <구멍가게>는 구멍가게를 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그 구멍가게의 오 남매 중 열네 살 먹은 둘째아들(작가)이 바라본 가족과 이웃 간의 따뜻하고도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식이 아재'는 가게를 닫을 시간쯤 거의 매일 들르는 단골손님이다. 한쪽 팔 다리와 입, 한쪽 눈까지 장애가 있어 말이 어눌하고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금방 보기에도 흉측스러웠다. 식이 아재는 늘 연탄 두 장과 쌀 두 홉을 사 가곤 했는데, 솔직히 나는 식이 아재가 물건 사러 오는 것이 싫었다." ('식이 아재' 몇 토막)

<구멍가게>는 모두 13개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다. '형제', '군고구마', '검정 고무신', '십구공탄', '부모', '꽁치 아주머니', '거짓말', '단골손님', '식이아재', '배달', '수학여행', '사춘기', '마지막 날'이 그것들이다.

주인공은 구멍가게의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연탄배달을 하기가 제일 싫은 소년이다. 소년은 불만에 가득차 있다. 늘 형의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했던 탓에 새옷 한번 입어본 적이 없다. 또한 소년보다 공부를 잘하는 형과 동생 탓에 구멍가게의 심부름은 모두 소년의 독차지다.

동화작가 정근표는 누구인가
1990년, 불혹의 나이에 작품활동 시작

"글쓰는 동네에서는 제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제 나름대로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그동안 각종 신문사의 신춘문예에도 여러 번 응모하기도 했죠. 최종심에서 아깝게 떨어진 적도 몇 번 있었고."

동화작가 정근표는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나 구멍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도우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작가는 불혹의 나이인 1990년에 <청구문학제> 아동문학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2월에는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을 그린 <고무장갑>이 KBS 'TV동화, 행복한 세상'에 방영되어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아빠의 선물> <엄마 따라 지옥갈래요> 등이 있다.

현재 대구 동산의료원 의공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작가는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몸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자식들에게 진정한 삶의 교훈을 주었던 것 같다" 라고 말했다. / 이종찬 기자
소년의 아버지는 구멍가게 장사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짐자전거를 끌고 야채시장에 나간다. 소년의 어머니는 고양이 세수만 겨우 한 채 진종일 손에 물이 마를 새가 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부모님을 옆에서 돕고 자란 탓에, 오남매 중 공부는 다소 뒤떨어지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속정이 깊다.

"며칠 동안 식이 아재는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 식이 아재는 몸이 아파 불도 지피지 않은 냉방에서 며칠 동안 꼬박 굶은 채 끙끙 앓았다는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방에 불을 지펴주었고…그날 이후부터 연탄 두 장과 쌀 두 홉을 미리미리 준비했다가 식이 아재에게 내어주었다."('식이 아재' 몇 토막)

<구멍가게>는 작가의 유년의 일기장이다. 이 일기장 속에는 1960년대 후반,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속정이 깊었던 부모님과 이웃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책 속에는 아들에게 새 팬티를 사주고, 자신은 아들의 팬티를 기워 입고 다니는 '부모'가 나오는가 하면, 빠듯한 살림에도 시어머니에게 매일 꽁치 한 토막을 올리는 '꽁치 아줌마'가 나온다.

또한 예쁜 여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멀쩡한 검정 고무신을 갈기갈기 찢었지만 끝내 '검정 고무신'을 신게 되는 작가의 웃지 못할 과거도 숨어 있다. 게다가 연탄 배달을 하기가 싫어 연탄을 파는 삼식이 형제에게 심통을 부리다가 삼식이 형제의 부지런함을 보고 이내 후회하는 작가의 여린 심성도 엿보인다.('십구공탄')

"형이 물을 가지러 나간 사이, 살며시 일어나 군고구마 봉지를 펼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온전한 고구마는 한 개도 없고 빈 껍질만 수북한 게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리고는 사발에 물을 담아 방으로 들어오는 형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박았다."('군고구마' 몇 토막)

<구멍가게>는 1960년대 후반 도회지에서 힘겹게 살았던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수록 주어진 삶에 더욱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비록 가진 것 하나 없이 가난했지만 이웃과 가족처럼 살갑게 지냈다. 이 책은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통해 물질자본주의에 채색된 우리네 각박한 삶의 종아리에 따가운 매질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펴낸 삼진기획 편집자는 "<구멍가게>는 책 출간 전에 가제본을 만들어 100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전 모니터를 시행했다"며 "그저 책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작은 것이라도 실제 독자들의 의견을 받아 오래 남을 수 있는 책으로 '완성'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멍가게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파는 곳

정근표 지음, 이미경 그림, 샘터사(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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