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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지구영웅전설>
ⓒ 문학동네
“나는 슈퍼맨 보조하는 바나나맨!”

70년대 대중문화의 수혜를 톡톡히 받으며 자랐던 이른바 '386' 세대들에게, 또는 그 이후의 ‘맥도날드’ 세대들에게 바치는 블랙코미디,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제 8회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만화적 상상력과 비현실적 공간에서 초강대국인 미국을 조롱하는 신랄하고도 재기발랄한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이 땅의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대중매체인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점점 문자문화인 문학의 위기론이 제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신인상’과 같은 문학인들의 등단을 위한 소급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와 외따로 떨어져 있어 마치 ‘다른 별’ 이야기로만 치부했었던 문학이라는 것이 때로는 이렇게 통쾌한 것일 줄이야. 딱딱한 내면세계를 다룬 소설들을 피해 숨어들었던 독자들에겐 마치 단비와도 같은 소설이 바로 <지구영웅전설>이다.

때는 70년대 말, 초등학생인 ‘나’는 너무나도 ‘초인적인’ 슈퍼맨과 원더우먼을 좋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친구가 가져온 포르노 잡지를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키고야 만다.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엄포를 듣고만 ‘나’. 결국 절망에 빠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도색잡지를 보다가 들켜서 자살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 평소 열광했었던 슈퍼맨 놀이를 하다가 죽은 걸로 위장하기 위해 목에 망토를 두른 채 가슴에 검은 사인펜으로 S자를 그린 후 뛰어 내리고 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너무나도 ‘거짓말처럼’ 슈퍼맨이 나타나 ‘나’를 구해준 뒤, ‘정의의 본부’가 있는 미국으로 날아간다. 그 곳에서 나는 ‘슈퍼특공대’의 일원들인 원더우먼, 아쿠아맨, 배트맨과 로빈을 만나게 된다.

‘나’는 ‘슈퍼특공대’의 대원이 되기 위해 원더 우먼의 생리대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고, 로빈의 두통약을 사다주면서도 ‘영웅’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나’는 슈퍼맨을 보조하는 ‘바나나맨’이란 이름을 부여받고 정식으로 ‘슈퍼특공대’의 대원이 되지만, 그들과 결코 어울리지 못한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나’는 정신병원에 누워 있고 곧 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거기서 배운 영어실력으로 학원 강사가 되지만 ‘나’는 여전히 ‘영웅’들의 존재를 믿는다.

다소 황당한 설정과 판타지적 이미저리,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패권을 차지한 미국사회, 즉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조롱도 서슴지 않는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작게는 매우 시사적인 작가라는 평과 함께 크게는 넓은 통찰력을 갖춘 대중의 군중심리를 헤집어 놓는다.

이 소설에서 ‘슈퍼특공대원들'은 지구를 위협하는 세력들-악당인 후세인, 노리에가, 카다피-들을 일망타진하면서 지구를 지킨다. 때로는 이들이 악당들을 쳐부수는 방법은 수단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으며 오히려 그들보다 더욱 폭력적이다.

주인공 ‘나’는 또 어떠한가. 어린 시절 동네마다 존재했었던 ‘보자기’ 두른 어설픈 ‘슈퍼맨’이 되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다.

‘나’는 결국 투신자살을 시도하다 그가 선망했던 ‘슈퍼맨’의 도움으로 ‘정의의 본부’로 가게 되지만 정작 ‘정의’를 실현한다는 ‘영웅’들에게서 ‘정의’를 찾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가 부여받은 ‘바나나맨’이란 이름도 작가가 의도한 상징적인 이름이 아니겠는가. ‘겉은 노랗다. 그러나 속은 하얗다’라는 속성은 결국 미국식 영웅주의(그들은 늘 ‘세계경찰’이라느니 ‘정의구현’이라는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는)에 대한 야유와 함께 미국을 선망하고 맹종했었던 기형아적 존재인 제 3세계를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다중 장르의 표현은 이 시대를 잠식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 쓰기이며 ‘낯설게 하지 않는’ 소설 쓰기의 전범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작가 박민규는 대학졸업후 한때 해운회사 영업사원,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잡지사 편집장으로 일했던 적이 있는 독특한 경험을 토대로 기발하고도 참신한 소설을 내놓게 되었다. 또 박씨는 문학동네신인상과 함께 제 8회 한겨레 문학상도 동시에 수상하게 되어 올해 가장 주목받는 신인 가운데 한 명으로 부상했다.

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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