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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어릴 적 허기 달래주던 먹을거리-8>을 쓰고 있었다.

“띠리리링”
“예, 여보세요”
“당신이어요?”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며칠간 내 기행(奇行)과 그 전의 다툼 때문에 거의 말도 않고 지낸 시간이 벌써 열흘째다. 그런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으니 필시 무슨 급한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생각했다. 여간해선 전화 할 리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왜요?”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글 쓰기 말고 뭐가 또 있습니까?”
“그럼요, 오늘 시간 낼 수 있어요?”
“왜요?”
“경동시장에 좀 다녀와요. 가셔서 배추 좀 사다놓아요.”
“웬일이래요?”
“장마 오기 전에 김치를 담가둬야 되는 것 아닌가 해서요.”

맞는 말이다. 결혼한 지 3년 6개월이 되는 동안 우리는 여름을 세 번 지냈다. 3년 차 까지는 별 잔소리를 다 해가며 옆에서 속된 말로 ‘씨엄씨’ 노릇 톡톡히 하였던 까닭에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요리는 절반 이상을 해왔다.

그러다가 해주는 대로 먹겠다는 것과 손을 떼고 지켜보면 아내의 음식 솜씨가 늘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요리에서 손을 놓은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런 나는 해마다 6월을 넘기면 ‘지혜로운 살림꾼은 장마가 다가오기 일주일 전에 김치를 담가 둔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해왔던 터다. 올해는 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기억하고 김치를 담근다고 하니 감격스럽지 않고 배길 사람 있을까?

두어 달 전부터는 찌개와 국 그리고 볶음이 입맛에 맞아 들어간다. 일취월장이라 했던가! 그래 이제는 모든 게 먹을 만하다. 30대 후반 아줌마가 신혼 때부터 3년 동안이나 칼자루도 제대로 쥐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곧 승천할 용처럼 대단한 발전을 한 것이다. 제철에 맞춰 웬만한 반찬도 척척 해내더니, 이제 김치도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려나 보다.

“그럼 오전 글 하나만 쓰고 점심 먹고 다녀오면 안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알았습니다.”
“아참, 그리고요 절이지 마세요.”
“왜요? 절여 놓고 약속 나가려고 했는데.”
“당신이 해 놓으면 이상해요.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아서요.”
“뭐요?”

딱 기가 막히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천하에 김규환이를 무시하다니! 그래, 얼마나 잘하는가 볼 일이지만 어느새 나는 음식 만들기를 몇 개월 손놓은 덕택(?)에 은퇴를 서둘러야 하는 위기의 남자 다름 아닌 상황에 처해 있다.

“배추 다섯 통에 마늘, 실파, 생강 사오시고 마른 고추도 좀 사오세요.”
“아니, 왜요?”
“그냥 유기농 고춧가루 더 사오면 될 걸 가지고 갈 도구도 마땅치 않은데 어찌하려고?”
“집에 있는 믹서로 갈면 돼요.”
“너무 번거로운 것 아닌가? 아이들 징징거리면 어쩌려고?”
“오늘 다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그냥 고춧가루로 담급시다.”
“그러면 맛이 없다니깐요.”

갈수록 태산이다. 아무거나 맛있다는 사람이 맛도 셈할 줄 알다니! 그래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이 속담 하나도 그른 데가 없다.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복귀할 때가 되었나 보다. 마음 속으로 아내가 일정 수준에 오르면 살림에 복귀하리라는 그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 건강도 더 나아지리라. 저녁은 아예 내가 할 작정이다. 그래 정말 이 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침 잠 많은 내가 아침을 하기는 뭐하니 저녁을 내가 하는 게 맞겠다.

진즉 이렇게 했으면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가면 다 해결될 것을 조바심 내며 앙탈부린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래 3년만 참으면 되니 뭇남성들은 새겨둬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배추 가격은 어떻던가요?”
“지난 늦봄보다는 많이 내렸어요.”
“알겠소. 그리 하리다.”

내일부터 나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작정이다. 누가 시켜서라거나 남자가 살림을 분담해야 한다는 논리까지도 필요 없다. 그냥 즐거워서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먹기 좋고 몸에 맞는 음식을 찾아 솜씨를 발휘할 생각이다. 그러면 우리 집은 모범적인 가정이 되지 않을까? 마음이 벌써 부풀어오른다.

그간의 내 행동에 대해 모든 여성과 아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오늘 아침 호박과 호박 잎 넣고 끓인 국도 아주 맛있었다.

아내 퇴근 전에 장을 봐두려면 나는 이제 시장에 가야 한다. 오늘은 진정한 보조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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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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