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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내리다

얼마만의 해갈이었던가. 새벽부터 내린 비는 그야말로 비님이었다. 도시의 찌든 때도 깨끗이 벗겨낸 이번 비는 때 이른 여름 더위에 밤잠을 설치던 도시인들의 기분마저 상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비를 밤 늦은 공원 산책 중 처음 맛보았다. 밤 12시쯤이었을까. 이때부터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산책을 하던 동네 사람들 중 누구 한 명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말을 안 해도 알 만한 이 느낌. '어휴, 시원하다.'

11일 오후 6시경, 폐수 방류되다

▲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폐수
ⓒ 이훈희
오후가 되어도 그칠 줄 모르는 비. 오랜만에 느끼는 청량감을 맛보기 위해 나는 우산을 쓰고 집 근처 뚝섬유원지로 갔다. 물방울을 피해 나팔꽃 밑에 조용히 숨어 있던 무당벌레, 촘촘히 짜여진 거미줄에 걸려 대롱거리는 물방울, 잎사귀 여기 저기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는 방아깨비 등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리는 유원지의 풀밭은 자연이 빚어내는 멋진 풍경이었다.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떼면서, 때로는 고개를 수그려 숨어 있는 나비와 벌레를 찾으면서 비 내리는 한강을 즐기던 내게 고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내가 본 것은 자맥질을 하고 있던 고니 주위의 물이 모두 하얀 거품으로 일렁이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하수구를 통해 시꺼먼 폐수가 방류되고 있었다.

시시각각 폐수가 흘러든 한강은 모두 시꺼멓게 변해버렸다.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아보니 가슴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역겨웠다. 조금도 쉬지 않고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콸콸 쏟아지는 폐수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길 수십 분. 산책을 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는 근처에 파출소가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ADTOP@
"지금은 공무원들이 퇴근을 했습니다"

▲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폐수
ⓒ 이훈희
얼른 파출소에 달려가 폐수가 방류되고 있으니 어서 와보라고 신고를 했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한강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했으니, 담당자가 곧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경찰관들은, "이 하수구는 생활 폐수를 내보내는 곳이 아니라, 공원 폐수를 내보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공원 폐수를 이렇게 내보내지 않는데... 또 이 하수구는 거의 안 쓰는데..."하면서 말을 흐렸다.

이들은 더 정확하게 알아봐야겠다면서 유원지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경찰관들은 다른 추측을 하였다.

"공원 폐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 위 공사 중인 곳에서 흘려보낸 것 같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온 한강공원관리소 직원 역시 폐수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이들의 난감한 표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경찰관의 말에 따르면, 이 하수구는 뚝섬유원지가 개발되기 전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서, 하수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시공업자만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폐수가 흘러나오는 하수구의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냥 갈려고 하는 게 아닌가.

'알 수 없다'는 말이 오고 가는 동안 폐수는 근처 한강 물을 계속 시꺼멓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두고 볼 수만 있을 노릇은 아니었기에 아주머니와 나는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항의를 하였다.

"그냥 가면 안 됩니다. 보세요. 지금도 이렇게 폐수가 흘러나오는데 방법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구청 직원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관리사무소측으로부터 우리가 들은 답변은 "지금 구청 직원은 퇴근을 했습니다. 내일 보고를 해야지요"밖에 없었다.

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지만, 신고를 한 지 1시간이 넘도록 관리사무소가 한 일은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하수구의 사진 몇 장을 찍은 게 전부였다.

우리 자식한테 어떻게 수돗물 먹이나

▲ 고니와 폐수
ⓒ 이훈희
경찰관과 한강관리사무소 직원이 사라진 뒤에도 하수구 옆에 서서 "아이고, 한강 물 다 죽네"라며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거리던 아주머니는 마침내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몇 년 전에도 바로 이 근처에서 하수구를 통해 폐수가 쏟아지는 걸 보고 주민들이 신고를 했으나, 한강관리사무소측은 무사안일로 대처하여 원성이 자자했다면서, 당시 방송사에서 문제제기를 하자 그제서야 폐수가 흘러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저 물을 어떻게 우리 자식한테 먹이나?"하면서 아주머니는 결국 뒤돌아서야만 했다. 나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다. 서울시가 한강을 아름답게 만든다면서 고니를 풀어 놓고 키우는 이유는 단지 눈속임이었던가.

각 동사무소마다 비치된 수돗물은 한강물을 정수한 것이다. 하지만 미군은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을 상대하는 유명 호텔도 수돗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연세대 정용 교수는 수돗물을 계속해서 마실 경우 암을 일으킬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면서 정용 교수가 한강물을 오염시킨 주범으로 손꼽은 것이 공장 폐수였다. 환경청에 따르면 카드뮴, 수은 등 중금속과 유해 화학 물질이 든 폐수가 전국 1843개 업체에서 하루 15만9000톤 꼴로 배출되고 있다. 더욱이 이 가운데 21%에 해당되는 폐수가 상수 보전지역에 버려지고 있다고 파악된다.

▲ 한강물을 시꺼멓게 만드는 폐수
ⓒ 이훈희
사실이 어쨌든, 내가 본 그 시꺼먼 한강을 본 사람은 누구나 다시는 수돗물을 마시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강을 관리하는 정부기관이 시간이 한참 지나서 원인파악에 나선다는 걸 안다면 더욱 수돗물을 기피할 게 틀림없다. 콸콸콸, 이렇게 쏟아지는 폐수를 우리 자식에 먹이고 싶은 부모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강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뚝섬유원지 근처에 공장이 없기 때문에 이건 공장 폐수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말은 틀렸다.

뚝섬유원지 바로 뒤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공단인 성수공단이 있으며, 이 공단에는 기계, 섬유, 신발 공장이 몰려 있다. 폐수가 과연 공단에서 흘러나온 건지, 아니면 일반 생활 폐수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폐수가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그것이다.

오랜만에 온 비 덕분에 기분 좋았던 서울 시민에게 비만 오면 폐수가 흘러드는 한강을 떠올려야만 한다는 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암담한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서울시가 하루빨리 이 일을 처리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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