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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의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한 여자와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자유롭게 써나갔다. 왠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든다. 열대의 바람처럼 살아온 남루한 한 사내의 반생이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일까. 다시 연탄과 석유와 김장김치와 따뜻한 창문이 그리운 계절이다. 헤어진 사람아, 갑자기 밤에 눈이 내려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부디 잘 버티며 생을 걸어 가다오."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은 소설가 윤대녕이 우리나라와 해외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느낀 삶의 여러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다. 다른 여행기와는 달리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면서 그 여인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여행 일기를 써 나간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주도, 내소사, 중국 등 이 책에서 전하는 여행지들은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곳들이다. 하지만 그 공간들에서 느끼는 의미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윤대녕은 이 책에서 자신 특유의 낭만적이고 섬세한 문체로 각 공간에 대한 독특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다.

그가 방문한 제주도는 흔하디 흔한 신혼여행지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랜 기간 제주에 머무르면서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성산일출봉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저자는 밤이건 낮이건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출봉의 모습을 통해 색다른 의미를 찾는다.

"밤이건 낮이건 또 성산 어디를 가든 일출봉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눈에 덜컥덜컥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나는 오직 한 각도에서만 고정관념으로 일출봉을 봐 왔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물이 실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산일출봉의 모습은 여행 사진이나 엽서 속에 고정되어 있는 한쪽 면이다. 하지만 일출봉은 한 각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고정관념을 갖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편견에 얽매여 있는 일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봄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표현하는 "봄이라는 유령"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윤대녕 특유의 낭만적이고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봄은 겨우내 짚단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고양이 새끼들이 저마다 눈을 뜨고 햇빛 속으로 기어 나오듯이 찾아옵니다."

"갯버들에 물이 오르듯이 봄이 되면 여인들의 종아리에도 밝은 빛이 스며 오릅니다. 그러다 벚꽃이 필 때쯤이 되면 비로소 얼굴 위까지 환해지는 것입니다. 봄은 분명 여인을 어여쁘게 하는 계절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아름다운 봄에 외로움을 느끼는 한 고독한 인간일 뿐이다. "내게 봄은 이런 계절입니다. 황사가 일며 겨우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한꺼번에 맥없이 잃고 혼자 꽃을 찾아다니는 계절 말입니다. 봄날 내내 꽃의 환영을 좇다 보면 다들 그만 가버리고 맙니다. 팔자려니 합니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해서 외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꽃을 찾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은 저만치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때의 느낌은 아마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혼자만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듯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봄 밤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면서 느끼는 그만의 서정성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과거에 대한 기억을 돌이키게 한다.

"황제 <2악장>을 듣고 있으면 그렇게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의 나, 완전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던 당시 거울 속에 자주 얼굴을 묻고 울던 나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한없이 슬프고 막막했던 시절의 나란 존재와 말입니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을 표현한다고 해서, 윤대녕의 글이 결코 지나친 로맨티시즘으로 흐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 낭만성 속에 삶의 깊이를 전달하기에 그의 글은 감동을 준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오감으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을 수다스럽게 지워내며 살아갑니다. 말, 곧 언어는 그저 기호 체계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 표현 방법이나 체계가 다른 것입니다. 소리와 색깔과 맛과 촉감과 풍경으로 육박하며 다가오는 진실은 결코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들이 너무나 많다. 그 많은 감정들을 마음에 담고 살기에, 인간사가 고달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색의 과정 속에 저자는 인간 삶이 너무나 무상하고 모든 존재의 끝은 어느 날 검푸른 우주에 샅샅이 지고 마는 것이라는 생각을 얻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그렇다면 에잇, 사랑이라도 해야겠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숭고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우리는 언젠가 소멸할 존재들이기에, 서로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의 삶이 제 빛깔을 내뿜으며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윤대녕 지음, 문학동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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