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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생 용띠, 우리나이로 쉰 두살.

전쟁통에 태어나서 몸이 약했던 터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부모님의 우려로 호적신고가 늦어져서 호적상으론 1953년생이니 법적으론 만 50세인 대한민국 보통의 중년남자입니다.

제 큰 아들이 지금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대학 4학년에 재학중이고 이 어려운 경제난 속에서 혹시라도 자신이 청년실업자의 대열에 설까봐서 노심초사하며 취업준비에 밤낮이 따로 없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들과 참 많은 토론을 했지요.

솔직히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 그의 삶이 너무나 존경스러워서 그의 가족사랑과 민족애,그의 정치적 경륜과 그 탁월한 두뇌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통찰과 온갖 지식의 해박함에 매료되어서 1997년 선거 때부터 정말 열열히 지지하고 혼신의 힘을 쏟아가며 그의 선거운동에 일조했었습니다.

제 아들은 그때는 고등학생 신분이라서 아직은 사회의 모든면에 어두운 때였으므로 아버지의 그 처절함이, 그리고 그분의 당선 확정시의 그 환호에 대한 열정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5 년이 지났습니다.

그 5 년동안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제가 믿엇던 그분의 그 탁월한 식견과 경륜, 그리고 해외의 그 수많은 지인들의 음양의 도움, 전국민의 피땀흘린 노력 등이 어우러져서 IMF의 국가적 경제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역사적인 남북의 정상회담을 성공리에 이루어내고 전 세계가 극찬한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해에 물론 그분은 여러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그 확실한 모티브가 되어서 인류사적으로 인정받는 노벨 평화상을 우리민족 최초로 수상하는 대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그분의 최대의 약점인 情 때문에, 자신이 박해받던 시절에 자신 때문에 함께 박해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작은 실수들을 눈감아 주다가 급기야는 그분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의 부정부패가 들어나기 시작했고 권력의 힘을 이용해서 한 몫 보려는 나쁜 사람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그분의 자식들이 연루된 부정부패들이 불거지기 시작했었습니다.

그 모든 부정부패들에 연루된 사람들의 감옥행이 시작되었고, 그분은 아픈 가슴을 감싸안으며 외부적으론 담담하게 두 아들과 자신이 어려울 때 가장 가까이서 자신을 보필했던 사람들의 감옥행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의 공과가 얽힌 채 5 년은 흘러갔고 우리 대한민국은 다시 대통령 선거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그 바람은 광풍이 되어 한 중견 정치인이었던 노무현을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각시켜 올렸습니다.

사실 당시의 민주당 지지자나 유력한 정치평론가가 아니라도 민주당의 차기 후보는 이인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는 이회창과 이인제 중 누가 당선될 것이며 민주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어떻게 이회창 대세론을 부수고 정권을 재 창출 할 것인가에 노심초사 하였겠지요.

그러나 5 월 광주는 노무현을 선택했고 그 5 월 광주의 선택이 노무현 바람을 광풍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제 아들은 노무현의 광신도가 되어가기 시작했고 저 또한 민주당의 경선을 관전하며 이인제의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신물이 나던 참이라 서서히 노무현의 인물 됨됨이와 정치경력 그리고 그의 정치역정 그의 사고등을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민주당의 경선이 노무현의 당선으로 귀결된 뒤 저는 어느샌가 저 또한 노무현을 열열히 지지하는 사람으로 바뀐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당선된 노무현의 행보가 김영삼을 찾아가면서 부터 저의 믿음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작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6 월의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노무현의 갈짓자 행보가 영 탐탁치가 않게 보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민주당과 노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도는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고 도무지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그 노도와 같았던 월드컵의 열기에 휩싸인 정몽준이 드디어 출사표를 던졌고 민주당도 덩달아서 후보 교체, 후보단일화 등 백가쟁명식의 논의와 발언들이 난무하는 등 급기야는 탈당 사태와 후보단일화 협의회라는 괴 단체가 활개치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 번 떨어진 노무현의 지지도는 상승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 조차도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우리집은 참 엄청난 고성이 오가는 난상토론이 벌어지곤 하였지요.

아직은 대학 3학년에 불과한 아들놈은 참으로 논리가 정연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노무현은 후보를 물러나면 안된다. 단일화 논의를 하더라도 노무현으로의 단일화여야만 되며 만약에 노무현이 선거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노무현을 깃발로 새로운 야당정치사를 써야한다. 재벌 대통령은 안되며 만약에 정몽준으로 단일화 된다면 이회창의 선거를 도와주는 것이 될 뿐이다. 지금 이회창 진영은 만약 단일화가 된다면 정몽준으로 단일화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가 약점이 많다는 것은 선거용으로 얼마나 좋으냐? 또한 정의가 승리했다는 것을 우리의 선거사에 남겨야 한다. 민족과 역사앞에 죄를 지으면 안된다.'

이러한 논리는 이회창의 집권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던 저의 생각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결국 그 자식놈의 말대로 저 또한 노무현을 재차 지지하게 되었으며 그 노무현은 단일화에도 성공하고 마지막으로 대권을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2002년 12월 대선이 끝난날 자정께 울린 우리집의 환호 소리는 온 이웃이 다 놀랄 지경이었으며 우리 가족은 마치 내가 당선된 것처럼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나를 기쁘게 했을까요?

첫째, 노무현은 선거 내내 김대중의 자산과 부채를 함께 승계하겠다고 공언했었습니다. 이회창의 대북 논리는 철저한 상호주의로서 받은만큼 주겠다는 것이었으며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노골적으로 폐기할 뜻을 나타내었지만 노무현은 그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했었습니다.

햇볕정책으로 이름지어진 대북 포용정책은 지금까지의 어떤 대북정책보다도 확실하게 북한을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다가오게 하였으며 김대중의 재임중에 비로소 한반도에 앞으로 영원히 전쟁의 참화는 없겠구나 하는 믿음을 심어주었었지요. 그 대북 포용정책으로 이뤄진 이만큼의 남북간의 교류마져 이회창의 당선으로 다시 물거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직했었습니다.

둘째, 노무현의 역사의식과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김대중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제나 약자편으로 보였던 노무현,언제나 악에 분노했던 것으로 비춰진 노무현,언제나 유 무형의 권력으로부터 자신과 국민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였던 노무현, 그 노무현과 이회창을 비교해보며 그렇게 노무현의 당선을 갈구했었습니다.

셋째, 우리 모두를 보이지 않는 사슬로 똘똘 묶어놓은 지역갈등, 지역차별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혹자는 세칭 3 金의 정치적 야욕 때문에 지역갈들이 생겨나고 치유되지 않는다는 궤변들을 일삼지만 역사적으로 이 지역갈등은 갈등이 아닌 차별이라고 과감하게 말하는 영남 정치인은 노무현 그가 유일했습니다.

묶인 사람에게 그 사슬을 스스로 풀라는 것은 계속 묶여 있으라는 논리입니다. 차별받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은 계속 차별하겠다는 뜻입니다. 노무현은 이 쉬운 논리를 아주 쉽게 읽을 줄을 아는 정치인으로 보였습니다. 그 또한 스스로 이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극심한 고초를 겪었으므로...

넷째, 새로운 주류의 탄생을 기대했었습니다. 친일,친미,친자본,반공,이 이데올로기 아닌 이데올로기로 똘똘뭉친 수구 보수주의자들,매판 자본가들, 그 떨거지들, 이들이 이루는 세칭 메인스트림이라는 민족과 역사앞에 죄인인 사람들에게 다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맡긴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고 이들로부터 해방된 조국을 건설하기에는 노무현 그가 제격이었습니다. 노무현을 둘러싸고 그를 지지한 세력들, 역사를 두려워하고 민족을 우선시하고 함게 번영하기를 기대하는 소시민 범부들이 새로운 주류를로 형성되기를 바랐습니다.

다섯째, 열심히 일하는 사라들이 발뻣고 잠자는 사회를 갈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이 최고인 세상, 돈이 곧 법인 세상에서 평생을 일해도 내집하나 장만하기 힘든 나라에서 아파트를 비롯한 부동산 투기만은 없어지길 바랐습니다.그는 행정수도를 이전해서라도 부동산 값을 잡겠다고 공언했고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온전히 교육받고 열심히 일하면 내 아들만은 주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기에...

그러나, 이제 저는 노무현으로부터 모든 지지와 기대를 접습니다.

이상의 다섯가지는 큰 줄기만을 나열했던 것인데 그의 취임 100일만에 이 다섯가지의 바램이 정 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난 현실앞에 저는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그와 그의 참여정부는 김대중의 자산과 부채중 자산마저도 까먹고 부채는 털고가기에 무척이 바쁩니다. 특검을 통하여 그 어렵게 이루어 낸 남북의 화해무드와 교류협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도록 만들었고, 역사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평양까지 가서 일구어낸 6.15 공동선언은 헌신짝이 되었으며 팔순 노인과 그 브레인들은 국고를 축낸 협잡꾼이나 사기꾼으로 매도되고 정상회담은 돈주고 산 것으로 폄하하며 그의 경제 브레인들은 줄줄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현실앞에서 차마 할말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누가 어떤 공직자가 민족을 위해 앞장서서 일할 것이며 남북교류에 힘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임기후엔 감옥행이 불을 보듯이 뻔한데.

그와 그의 참여정부는 약자와 정의의 편도 아니었습니다.단지 그렇게 포장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방미에 수행했던 재벌 총수들이 그의 방미에 얼마만한 도움을 주었으며 그것이 국익에 얼마만한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삼계탕집에 모여앉은 노무현과 이건희와 재벌총수들의 건배모습에서, 가십으로 전해지는 그의 발언(이건희 회장 가까이 자리해라)에서 이미 모든 기대를 접었습니다.

그와 그의 참여정부는 지역화합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친 영남,영남 가까이가기, 영남민심잡기, 이것이 그와 그의 정부 100일의 답입니다. 인사차별 정책차별 그리고 궤변(사람을 쓰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3급아래에서 많이 기용하여 그들을 키우겠다)으로 일삼고 신 호남 소외론이니하는 괴물 언어를 만들어서 호들갑을 떨고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을 동교동계나 구주류로 몰고, 어느덧 차별은 사실로 굳어져서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엔 어디든지 경상도 전라도가 나뉘어서 개거품을 물고 싸움질로 낼새는 줄을 모릅니다.

그와 그의 참여정부에서는 새로운 주류가 확실히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상태로의 주류가 아니라 신악이 구악을 능가한다는 격언처럼 청와대와 정부의 일명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민주당의 신주류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그토록 폐기되기를 염원했던 패거리주의가 되살아나고 그것도 모자라서 구악의 세력들과 하나로 뭉쳐가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과연 저 구악 세력들과 다른점이 무엇이며 이들이 주창했던 정의와 평등은 무엇을 말함이었을까에 심각한 의문을 던집니다. 이들은 단지 그들이 갖고있는 것들을 빼앗아 누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제 그와 그가 통치하는 그의 참여정부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 요원합니다. 행정수도를 건설해서라도 수도권의 집값을 잡겠다는 공약집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을 터인데 또다시 수도권 두 곳(김포,파주)에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발표하여 급기야는 서울의 아파트 분양가가 평당 3000만원대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집값 시대를 열었습니다.

30평 아파트 한 채에 무려 6-9억. 연봉 3000만원의 소시민이20-30년동안 아무것도 안먹고 입입고 몽땅 모으다 죽어야만 만질 수 있는 돈. 그 돈이어야만 집을 가질 수 있는 나라와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겠습니까? 부동산 투기가 가장 빠른 재태크 수단이 이닙니까?

이제 모든 기대와 그의 당선시 환호했던 열정까지 한꺼번에 접으면서 저는 어젯밤 제 아들과 다시 한 번 심각한 토론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제가 아들을 이겼습니다. 역사와 민족앞에 우리 모두가 다시 큰 죄를 지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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