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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뭐 그리 좋다고 고향산천을 이리 들먹이는가? 나에게도 고향이 있고 그에게도 고향이 있다. 산골에서 태어난 사람, 너른 들판 평야에서 나서 자란 사람, 일렁이는 바닷가에서 추억을 몽땅 먹고살았던 사람, 희뿌옇고 시커먼 탄광이 고향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그 출신도 가지가지다.

그곳에서 나서 자란 것이 자랑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 진절머리나서 영영 잊고 싶은 이, 도회지에서 살아 농사짓고 고기 잡던 풍경을 책이나 간접 체험으로나마 아스라이 떠올릴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앞으로 가느라 이 모든 걸 잊고 지내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군상(群像)이 있을 터다.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콱 막힌 산골 말이다. 그 고향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나는 다시 고향을 찾았다. 고향은 시골이요, 촌이요, 농촌이요, 촌놈들이 깨 활딱 벗고 멱감으며 맘껏 뛰놀았던 공간이다. 내가 있었고 형제가 있었고, 부모가 살았던 곳이다.

이제는 7-80 촌로(村老)가 되어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애지중지(愛之重之) 자식 기르느라 어느 것 하나 맘껏 소유해 보지 못한 못난이, 이제는 그 못난 인생의 깊은 터널을 지나온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젠 더 이상 미련 없음을 결심하고 다음 세상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곧 우리들 부모이다.

그 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곳이 뜰과 들을 거쳐 평야, 광야, 서울이라는 걸 알면서도 뜰과 들에 나가 뼈가 부서져라 일 할 줄은 알았으나 평야로 광야로 서울로 나서는 일은 차마 하지 못했던 이들이다.

그들의 놀이터는 골, 뜰, 들이었다. 가끔 5일 장에 나가 짜장면 한 그릇이나 시장국밥 한 술 뜨는 걸로 새로운 것에 대한 허기진 욕구를 가득 채우고 돌아왔을 뿐이다.

내가 아는 골짜기, 냇가만 하더라도 많은데 그분들이 알고 살아왔던 곳이 어디 한두 곳이랴? 나에겐 다만 스쳐 가면 되었을 좁은 땅 덩어리가 그들에겐 다였다. 전부였다. 그 넓은 길을 지게를 지고 꼴 망태를 메고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세상의 모든 꿈을 담아왔다.

산에 올라서는 나무, 나물, 약초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허리가 휘도록 듬뿍 담아왔고, 들에 나가서는 알곡을 철마다 거둬서 가져 오셨다. 골짜기에 가서는 개구리 서너 마리 꿰어 오시고, 논가 수렁에서는 미꾸라지 한 무더기 칡 잎에 싸서 아이들 먹으라고 내놓으시고 조용히 비켜서셨던 분들.

고향은 고행이다. 고향은 고난일 수 있다. 고향에서는 희망을 논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논 밭 팔아먹고 일찌감치 고향 떠나 도회지에서 얼른 땅 한 평이라도 사는 게 쉬운 지름길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를 못한다. 자꾸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의 엉성한 다 쓰러져간 집과 이윽고 팔려버린 옛 집을 추억하며 산다.

아이들 울음소리 그치고 나눠 먹을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그 마을에서 무슨 꿈을 꿀까? 다시 찾아가서 마땅히 음료수 대신 도랑 치고, 가재 잡아 술 한 잔 나눌 친구가 있기나 하는 건가? 내 집 자그맣게 올릴 때 말하지 않아도 거들어 주러 어기적어기적 느림보퉁이가 되어 사립문을 들어설 동무 있는가?

백아산이 앞산인 그곳에는 무척이나 괴상한 이름을 단 골짜기가 많았다. 뒷골, 가는골, 소로골, 짐덕굴, 검덕굴, 붐웃골, 소쟁이, 참난쟁이, 감난쟁이, 욋등, 항월, 평까끔, 핵꾜보탱이, 비까리, 극락, 동정지, 정지동...

그 골짜기를 따라 내려온 물길을 따라 논이 갈리고 땅이 갈리고 마을이 갈렸다. 갈린 그 경계는 곧 사람들의 생활을 좌지우지했다. 눈감고도 논두렁을 지나가도 옆으로 자빠지지 않았고 그곳에 이르면 맘이 편해졌다.

돌부리 하나에 풀뿌리 하나, 꽃 한 송이와 나무 한 그루가 친구였고 개구리 한 마리 들짐승 몇 마리가 어울려 살았다. 유독 물 양이 적었던 탓에 모내기 한번 하려면 사나흘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멱살잡기 심하게 하는 건 약과고, 상대를 논바닥에 내동댕이친 사이도 있다. 낫으로 위협을 하여 내 논에 물대기를 하고 삽이나 쇠스랑으로 먹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이도 있었다.

쩍쩍 갈라진 논밭을 보며 품앗이로 물 품어 논 물 대고 어제 다툰 일 탁주 한 사발로 말끔히 씻어냈던 기억으로 돌아가면 고향마을이 눈에 선하리라. 그 곳에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생각은 하지만 막상 살아가는 길이 있으니 차일피일 미루고 얽매어 살다보니 황금 같은 시간이 날로 지나간다.

그 어떤 조건에서나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땅 하나 장만해서 논두렁 밟고 산길 오르며 추억할 수 있을까? 며칠 시간 내서라도 모밥 한 번 얻어먹으면 원이 없겠다.

오늘밤 나만 가면 다 해결되는 것을 여기 머물러 있음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꼼짝달삭 못하는 건 아닌가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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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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