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먹음직스러운 앵두. 앵두빛 입술을 가진 사람을 미인이라 한다지요?
먹음직스러운 앵두. 앵두빛 입술을 가진 사람을 미인이라 한다지요? ⓒ 김규환
1988년인 15년 전 군대 가려고 집에 내려가 있었다. 고향 마을에선 아직 경운기가 조금 보급되었을 뿐 소에 의존하여 쟁기로 땅을 갈고, 써레로 골라 모내기를 했다. 모를 심는 것도 이앙기가 보급되지 않은 때라 손 모를 심었다. 20여일 품앗이를 해가니 차차 들판이 푸른 나락 심은 논으로 바뀌어갔다.

이 때도 동네에 청년이 거의 없었다. 모를 바지게에 지고 날라 논에다 미리 고루 던져 모심기 좋게 준비를 해주는‘모쟁이’를 자처하고 날마다 일을 나갔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나를 두고 착하고 일 잘 한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상(上) 일꾼 대접을 받았다. 막걸리도 원 없이 먹었다.

집에는 오래된 배나무 한 그루, 감나무 세 그루, 대추나무 한 그루, 초피나무 몇 그루가 있었고, 물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집안에 그늘지면 좋을 게 없다’며 해마다 낫으로 가지를 잘라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이 물앵두나무는 참 앵두와 달리 금새 가지를 쭉쭉 뻗어 원상 회복하여 2년 째 되던 해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열매를 매달아 나를 들뜨게 했고,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줬던 고마운 나무였다. 나는 꽃 필 때보다 꽃 지기를 더 기다린 아이였다. 또한 물앵두나무는 흉고직경이 10cm가 넘고, 키도 5m 이상 자라는 큰 나무였다. 참 앵두나무가 땅 바닥에서부터 가지가 수도 없이 나와 아이들 손에 닿기 딱 좋을 높이에 있는 것과는 달리 물앵두나무는 소교목(小喬木)이고 덜 시기 때문에 내 입맛에 맞았다.

앵두꽃. 꽃이 필 때 열매를 떠올리는 성급함. 기어이 비오는 날 아침 먹고 말았습니다.
앵두꽃. 꽃이 필 때 열매를 떠올리는 성급함. 기어이 비오는 날 아침 먹고 말았습니다. ⓒ 김규환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와 있거나 잠시 소죽 퍼주러 집에 들르면 동네 꼬마녀석들 서넛에서 예닐곱 명이 우리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아이들은 대문이 늘 열려 있어 집으로도 들어왔고, 옆 집 큰 댁 담장 쪽으로도 얼씬거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 천만한 담벼락은 아랑곳 않고 앵두나무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네를 쓸고 다니던 아이들은 주인인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탐색을 마치고 이제나저제나 하며 주인 없는 틈을 타 따먹을 궁리를 하였을 터고 눈에 아른거려 딴 데 가는 걸 포기한 것처럼 집요했다. 아직 푸릇푸릇하여 먹으려면 며칠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이들 발길이 잦아지자 앵두가 정말 붉게 익어갔다.

해강이가 포즈를 잘 취해줬습니다. 지 입에 먼저 '쏘~옥', 다음이 동생 솔강이, 엄마, 아빠 차례였지요.
해강이가 포즈를 잘 취해줬습니다. 지 입에 먼저 '쏘~옥', 다음이 동생 솔강이, 엄마, 아빠 차례였지요. ⓒ 김규환
학교 다니느라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도 생전 처음 본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엉겨붙기 시작했다. 흐르는 코를 손으로 훔치고 때론 달작지근한 누런 코를 혀로 낼름 빨아먹고 팔뚝엔 땟국물이 가득하고 반바지에 반소매 옷을 입은 촌구석의 아이들.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도 따라왔다. 게 중 가장 큰 아이가 용문이 형님 큰아들 인광이였는데 당시 6살이었고 나머지는 서너 살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에 기대있으면 집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뭐 하는가 잠시 지켜보면 감 딸 때 쓰던 기다란 ‘간지대’를 어디서 구해왔는지 앵두나무에 대고 휘둘러 패대고 인광이는 돌담에 오르려고 까지 한다.

‘요놈들이 근 보름 이상 입을 즐겁게 해줄 앵두를 다 따먹겠네. 이러다가 내 차지는 없는 거 아냐? 저러다 일나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지네들 속마음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대뜸 이렇게 말을 한다.

줄줄이 매달린 앵두. 030525 서울 안암동에서
줄줄이 매달린 앵두. 030525 서울 안암동에서 ⓒ 김규환
“삼춘~”(삼촌이라? 지네들이 나 더러 언제 삼촌이라 했는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몇 번 지나칠 때 성아 또는 옵빠라고 했던 아이들이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엉, 왔어?
“삼춘 범 있어?”
“응 저거? 저건 범(버찌)이 아니고 앵두인데.”
(아이들 두 명이 반바지 차림 내 다리를 잡고 있다.)
“있잖아 삼춘~ 앵두 좀 따먹으면 안될까?”
“그래 그럼 삼촌이 날마다 한 대접씩 따줄텡께 니네들은 담 위로 올라가면 안 된다. 삼촌이랑 약속할 수 있어?”
(일제히)“잉”
“절대 안 올라간다고 약속했지? 자 그럼 손가락 걸자.”

아이 일곱 명과 하나하나 손가락을 걸어 신사협정을 맺었다. 곧 부엌으로 들어가 시렁 설강에 올려진 널찍한 국 대접을 하나 갖고 나왔다. 정지 문 앞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와 있었다.

“자, 앵두 따러 가자.”
“야~” (아이들 고함소리가 마치 병아리들이 ‘짹짹’ 하는 것 같은 착각을 했을 정도로 순진하고 맑은 소리였다.)
“그럼 삼촌이 따 줄 테니까 아래서 기다리고 있거라.”
“잉”

마루에 걸터앉아 발짓을 해대며 “흠냐리흠냐리”, “음냐음냐” 알맹이만 먹고 씨를 마당으로 “퉤-” 뱉는 아이들이 귀엽고 정말 예뻤다. 한 명 당 30-40개 가량을 먹고는 다음 만날 약속 시간을 정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갔다.

중 2 때 구례 화엄사에 수학여행 갔을 때도 많이 팔더군요.
중 2 때 구례 화엄사에 수학여행 갔을 때도 많이 팔더군요. ⓒ 김규환
점심때, 저녁때를 가리지 않고 집으로 몰려 온 아이들에게 앵두 따 주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니 일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되었다. 매일 출근부를 찍다시피 한 아이들과 시름 한 것도 열 닷새가 넘어간다.

마지막 남은 한 그릇을 마저 따주고 나니 더 이상 줄 게 없었다. 예년에는 가지 끝에 달린 두어 그릇 분량을 새들 밥이나 하라고 남겨뒀지만 그 해에는 그럴 수 없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따줬다. 그 날 나는 오히려 죄지은 양 미안한 마음이 들고 더 이상 이 적막한 집에 어린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을 걸 생각하니 서운함을 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그 땐 아버지와 잠시 내려간 내가 가족의 전부였다.)

앵두 한 그릇 드실래요? 며칠 더 지나야 맛 있겠습니다.
앵두 한 그릇 드실래요? 며칠 더 지나야 맛 있겠습니다. ⓒ 김규환
아이들에게 앵두를 다 따주고 난 다음날‘보름간의 삼촌’노릇을 했던 나는 아이들이 올지 안 올지 시험하기로 했다. 매일같이 드나들어 어느새 버릇이 되었는지 조금 늦은 시각에 어김없이 도착했다.

“삼춘, 범 없어?”
“응, 앵두 없는데. 어저께 다 따묵었잖아~”
“이잉~”
“삼촌이 진짜 ‘범’ 따 줄게. 범은 아직 안 익었응께 다섯 밤만 자고 또 보자. 알았지?”
“형! 그거말고 저거 따주라니까.”(가장 큰 인광이가 갑자기 형이라 불렀다. 수십 번을 삼촌이라 했던 아이가 배신을 때린 것이다.)
“?”(형? 띵!)
“그럼 오빠, 범은 언제 따줄 거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이놈들이 이렇게 간사하다니! 그래 내가 언제 니네 삼춘이었냐?)

아무리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대우를 받다니! 그 뒤로 몇 번이나 친해보려고 했지만 그 뒤로도 줄곧 형이나 오빠로 불렸다. 스물 두 살 먹은 농촌총각은 따돌림을 당하고 말았다. 대단한 놈들. 언제 한 번 만나면 군밤 열 대씩이다. 앵두 따 줄 때는 각자 집에 돌아가서는 ‘앵두 삼촌’ 자랑했을 아이들이 보고 싶다.

아직 조금 덜 익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부터 따 먹어야 하루 하루 맛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딱 한개 주더군요.
아직 조금 덜 익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부터 따 먹어야 하루 하루 맛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딱 한개 주더군요.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