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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준비하러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학교(경북대학교)에 가보았어요. 도서관에 가서 밀린 책도 반납하고 곳곳을 둘러보니 대동제 기간이더군요.

축제 분위기에 덩달아 마음이 들뜬 저는 북문 부근의 민주광장을 지나는 길에 어느 아주머니의 "흥보가 나온다"며 흥을 돋우는 소리에 이끌려 어느새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흥부네 박 터졌네'라는 제목의 그 마당극은 흥부전과 춘향전, 심청전의 내용을 새로이 재구성하여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담아낸 수작이었어요. 관객들의 반응도 좋아서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이 자리를 마련한 총학생회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섭외에 300만원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훌륭한 공연을 공짜로 보았다는 생각에 고맙기도 했지만 좀더 홍보가 되었다면 더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학교 총학생회 부학생회장으로 있는 제 친구 기훈이가 주위에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그 녀석이 학교 게시판에 잘못 올린 공지로 영화를 보러 갔다 허탕친 기억이 있어 바로 그에게 다가가 따졌지요.

알고 보니 늦게까지 일하다 밤을 넘긴 채 글을 남기게 되어 글 제목의 '내일'이 다른 날을 가리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축제 준비로 바쁘게 수고하는 와중에 생긴 일이라 크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데 기훈이가 조금 있다 이어지는 <게릴라 콘서트> 꼭 보러오라고 하더군요.

배도 고프고 했지만 친구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다시 민주광장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게릴라 콘서트>는 별로 볼 게 없었어요. 이제껏 단식했던 학생회장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공연하는 자리였으니까요.

오히려 저는 그 자리에서 망가지는(?) 학생회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단식으로 뱃살 빠졌다고 좋아하고, 나와서 노래 부르다 가사 까먹고, 신나는 리듬에 몸을 맡기고….

간혹 잘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실수도 하고, 어설픈 멋도 부리는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사회자조차도 투박한 회색 T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마이크를 잡고 있었으니까요.

<게릴라 콘서트>의 압권은 마지막 편지 낭독 때였습니다. 한총련 대의원이란 이유로 수배자여서 지난 어버이날에도 집에 가지 못한 기훈이가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부른 때였지요.

저와 같은 98학번으로 학교에서 꽤 나이가 든 선배임에도 그 녀석은 앞에서 낭독하며 울먹이느라 편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하긴 저도 그 놈을 뭐라 할 처지는 못 되네요. 여느 후배들처럼 저 또한 눈물을 훔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기훈이는 특히 '못난 아들이 드립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말문을 잊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였습니다. 보는 저희들도 정말 가슴이 찡했어요. 편지는 아래에 첨부하오니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한총련 합법화와 관련하여 최근 5.18 기념행사에서의 차질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굉장히 화가 나 엄중한 처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칫 한총련 합법화 문제까지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방문에서 보여준 실망스런 모습으로 시민사회에서 반대의 표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것을 대신해 준 한총련이 수구언론의 여론몰이에 또다시 십자가를 지게되는 것을 바라보며 참으로 착잡한 심정입니다.

그것은 특히 5월 정신의 계승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가 5월 정신의 계승인 '평화와 통일'의 의지를 실천하고자 굴욕외교 규탄에 나선 그들을 법으로 굴복시키며 권력의 횡포를 휘두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요구와 양심의 소리에 따라 행동해온 한총련의 합법화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인격과 성격을 자의적인 잣대로 재단,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하는 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이니까요.

사랑하는 어머니께
기훈이가 어머님께 올린 편지

단신 9일째 되는 오늘, 어머니께는 다행인 소식이겠지만 해단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단식을 시작할 대 대구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구에 올라오신 어머니는 벌써 눈이 벌개질 때까지 울고 계셨죠. 너희 단식단이 단식을 그만두든지 어머니 당신이 투쟁에 나서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겠다고 눈물을 보이셨죠.

자식 걱정되기는 하지만 앞서서하지 않겠다던 어머니가 못난 자식의 못난 투쟁에 함께 하겠다고 선언하신 날, 저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날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수배자 부모님들이 삭발 단식투쟁에 나설 때도 그랬지만,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못난 자식 때문에 부모님에게까지 짐을 지우게 된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수배를 더 받더라도 단식투쟁 같은 것 하지 말라던 어머니 말씀! 집에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단식투쟁이 어머님께 또 다른 고통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아픔을 드렸습니다. 또 한번 철없는 아들의 철없는 몸짓이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2001년이 떠오르네요. 어머니 건강 해칠까봐 단대 회장 한다는 것도 수배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었죠. 마지막으로 집에 갔던 날,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마디 해놓곤 울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가슴 졸이며 정든 집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맏이를 떠나 보낼 준비를 조용히 하고 계셨죠!

수배 3년. 99년 두 달간 맏이의 옥바라지에, 주위에서 암 걸린 사람 같다라고 할 정도로 여린 분이 꿋꿋하게 이겨내셨습니다. 세상 모두가 저를 욕하고 손가락질해도 저를 믿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믿음 하나가 수배자 가족 3년 세월을 버티게 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 생각 좀 하라고... 왜 그리 철없냐 라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데모냐 라고 호통도 치셨지만 자식에게 지금 자수하러 가자고... 학교 밖에 나가자고... 그런 빈 말 한번하지 않으셨던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수배 3년차지만 내 생각과 의지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지금껏 왔던 것은 부모님... 어머님의 도움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자식이 일부러 불효하고 싶겠어요. 세상 어느 자식이 그리운 집을 가고 싶지 않겠어요. 어미니 아시죠? 제 마음을...

이 생활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랑 등산도 다니고... 어머니랑 쇼핑도 가고... 정선이랑 술도 한잔하고... 거실에 누워서 창 밖 바다를 바라보며 따사한 오후 여유롭게 맞이해 보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그들이 사람이라면... 170여명의 정치수배자들을 가만히 놔두진 않겠죠. 자식을 옥죄는 국가보안법에 이적규정에... 수배에 이 땅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절규하시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그냥 두진 않겠죠.

그래도 가슴이 찢어지는 건... 이런 수배학생의 고통, 분노, 부모님들의 눈물을 이용해 젊은 청춘들의 이상을 거세해 보려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끝을 맺을 때가 되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다시 고통 속에 몰아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오지랖 넓게 이해해 볼 려고도 했지만, 수배가족들의... 그리고 어머님의 눈물을 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주머니만 채우고 싶고 제 몸, 제 자식만 귀한 줄 아는 삐딱한 모습. 가진 것도 없고 사람사랑과 높은 이상만을 가지고도 유린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처럼 쌍욕하고 달려들면 똑같은 사람이 되니 예의를 갖춰 항의해야죠. 투쟁해야죠.

새 봄... 수배 해제된 몸으로 집에 가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여름 되어 본의 아니게 어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단식하면서 얻었던 희망. 오늘 있을 <게릴라 콘서트>가 더 큰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어머니.. 오늘 참석할 친구들의 따스한 눈빛이 바로 희망입니다.

단식중인데 말 많이 하지 마라던 걱정 어린 눈빛에 말을 줄여야 했던 일이 생각나 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간만에 어머님께 쓰는 편지라 말이 길었네요...

건강하세요.

정말..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2003년 5월 20일
못난 아들이 드립니다. / 김기훈(경북대 35대 행복교감 자주총학 부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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