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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 네 거리에 있는 룡정을 상징하는 조형물.
룡정 네 거리에 있는 룡정을 상징하는 조형물. ⓒ 박도
룡정의 서전서숙

1999년 8월 6일 금요일. 눈을 떠보니 2시 30분이다. 오늘은 청산리 전적지와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라서 일찍 잠이 깼나 보다.

다시 잠을 청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맑았다. 이 선생과 같은 방을 쓰고 있지만 다행히 침대 사이에 간이 벽으로 나눠져 있어 독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등불을 켜고 침대에 뒹굴면서 어제 일정을 정리하고, 지도를 펴놓고 오늘 답사여정을 더듬었다. 일단 발길을 거쳐온 곳은 책을 읽으면 마치 영화를 본 듯 장면이 뚜렷이 떠오르지만, 가보지 않은 곳은 책을 읽어도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역사 공부에서는 기록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발로 답사해서 온몸으로 확실히 체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 방법인 것 같다.

옆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 선생도 일찍 일어났나 보다. 그제야 세면장으로 갔다. 대학 부설 빈관인 탓으로 시설이 비교적 좋았다. 하루 종일 아무 때나 세면을 할 수 있는 점이 편리했다.(중국에는 아직도 지방에 따라, 빈관의 등급에 따라, 시간제로 급수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5시 정각. 약속보다 30분 일찍 이 선생과 함께 빈관 로비로 나갔다. 잠시 후 약속 시간 5시 30분에 어제 안내했던 허 기사가 다른 친구를 데리고 왔다.

어제 그렇게 철석같이 구두 약속을 했고 봉사료까지 그가 요구한 대로 주기로 했건만, 허 기사는 오늘 갑자기 자기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공장에 보냈다면서 대신 친구 차를 이용하라고 했다.

언뜻 어제 운행 도중, 핸드폰으로 여러 곳으로부터 예약 흥정하는 게 미심쩍었다. 밤새 자기 차가 고장났다니 그의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약속을 저버려 뒷맛이 씁쓸했다.

이때가 한창 관광객이 몰려드는 절정기라 조건이 더 나은 손님을 받기 위해 일방으로 약속을 파기한 듯했지만, 먼길을 떠나면서 싫은 소리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여 함께 온 친구에게 오늘 답사 여정을 설명하고 잘 부탁하면서 차에 올랐다.

다행히 새로 온 기사는 청산리 전적지에 안내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 기사들도 신의보다는 눈앞에 이익을 더 챙기는, 벌써 영악스런 천민 자본주의 물결에 스며든 듯해서 뒷맛이 씁쓸했다.

허 기사가 판단하기에는 우리 일행이 쇼핑이나 즐기면서 돈을 펑펑 쓰는 봉으로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어제 빡빡한 일정으로 독립운동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는 룡정 시가지를 건성으로 지나쳤다.

오늘 새벽에 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를 펼쳐보았더니 북간도 지방 민족주의 교육의 발상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빠트려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청산리로 가는 길목에서 용정이 그리 머지 않아서 다시 들렀다.

룡정 거리는 우리나라 어느 중소 도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친밀감이 갔다. 거리의 간판도 한글이 많았고, 지나치는 행인 중에도 한복차림이 듬성듬성 보이는 게 조선족이 더 많은 듯했다.

도시 전체가 한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우리나라 1960~70년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내 한복판 로터리에는 룡정의 상징물인 용을 새긴 황금색 조각이 철 기둥 위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서전서숙 옛 터로 현재 길림성 룡정시 룡정실험소학교의 교문과 현판
서전서숙 옛 터로 현재 길림성 룡정시 룡정실험소학교의 교문과 현판 ⓒ 박도
룡정 거리에서 몇 번이나 길을 물은 끝에 룡정실험소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는 서전서숙 유적지를 찾았다.

이 서전서숙은 헤이그 밀사사건에 참여한 이상설(李相卨) 선생이 1906년에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신학문과 함께 철저히 항일 민족의식을 교육하였다.

설립 이듬해인 1907년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떠나고,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그 해 8월 하순 1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90여 년이 지났건만, 룡정실험소학교 교정에는 룡정 항일역사연구회에서 세운 ‘瑞甸書塾遺跡地’(서전서숙유적지)라는 돌비석이 동북해방기념비, 소년영웅상과 나란히 서 있었다.

서전서숙 유적지 기념비
서전서숙 유적지 기념비 ⓒ 박도
마침내 룡정을 떠나 청산리로 달렸다. 이른 아침이라 차도 뜸하고 아스팔트 도로 언저리의 경치가 아름다워 기분이 아주 상큼했다.

기사는 그제야 자기 이름이 한룡운(韓龍雲)이라고 소개하면서 자기 할아버지 고향이 경북 경주라고 했다.

나는 당신 이름이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만해 선생의 함자와 같다고 했더니 그는 매우 좋아했다.

그의 승용차는 무척 낡았다. 속도계 바늘조차 움직이지 않았고 문짝도 밖에서는 열리지 않아 내리고 탈 때마다 기사가 안에서 열어야했다.

서울에서는 벌써 오래 전에 폐차되었을 고물차였다. 그런데도 그는 전속력으로 몰았다. 속도계가 움직이지 않으니 시속 몇 십 킬로미터로 달린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안전 운전을 부탁했으나 한 기사는 걱정 말라면서 아직도 자기 차는 이삼 년 더 굴릴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하긴 오늘 일정도 여간 빡빡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출국 전 서울에서 보험이나 들어놓고 출국하였을 걸’ 하는 생각도 들다가, ‘어차피 인명은 하늘에 달렸는데, 이제야 소심해 한들 불안감만 더할 테지’하며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느라고 요기도 못했다. 산촌이라 도로 언저리에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설령 식당이 있더라도 중국의 한촌에는 이른 아침에 문을 여는 곳이 거의 없다고 했다.

한 기사는 길가 참외밭에 차를 세웠다. 참외 한 봉지(6개)를 샀는데 참외밭 주인은 4원을 달라고 했다. 개구리참외로 달고 맛이 있었다. 참 오랜만에 먹어보는 개구리참외였다.

중국 농산물 값은 엄청나게 쌌다. 베이징 교외의 명13릉에서도 5원을 줬더니 복숭아를 한 봉지(30여 개)나 담아주었다. 넓디넓은 땅에다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되니, 이런 값싼 농산물이 한국에 수출돼 우리 농민들의 주름이 늘어가는 이유를 알 만하였다.

한 시간 남짓 아스팔트길을 잘 달렸는데 이도구(二道溝)부터는 비포장 도로였다. 거기는 백두산 가는 길로써, 연길에서 오는 길과 만났기에 백두산 가는 관광 버스가 줄을 이었다.

한 기사는 우리도 이대로 달려서 백두산부터 먼저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랑촌 일대와 청산리를 들리자고 제의를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는 백두산을 보는 것보다 어랑촌·청산리 항일전적지를 답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령 시간이 안 된다면 오늘 백두산은 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더니, 한 기사는 와룡(臥龍)이란 곳에서 백두산 가는 길이 아닌 다른 좌측 좁은 길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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