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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방학 중이라 고즈넉한 명동소학교 , 운동장에는 온통 잡초밭이었다
마침 방학 중이라 고즈넉한 명동소학교 , 운동장에는 온통 잡초밭이었다 ⓒ 박도
명동소학교

마을 청년의 분에 넘친 환송을 받으며 명동촌을 떠나 눈앞에 빤히 보이는 명동소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명동소학교는 세 번이나 화재를 입었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의 소굴로 비쳐져 1920년 일제의 경신토벌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보복을 당했다.

1920년 10월 20일, 청산리 전투가 개시되기 바로 전날, 일제 토벌군이 이 학교를 불 질렀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를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다녔다. 지금의 명동소학교는 분명 윤동주 모교이지만, 당시 위치가 아니고 개울을 건너 옮긴 곳이라고 했다.

룡정시 지산진 명동소학교 교문, 널빤지 담이 예스러움을 자아냈다.
룡정시 지산진 명동소학교 교문, 널빤지 담이 예스러움을 자아냈다. ⓒ 박도
오늘의 명동소학교는 시골 분교처럼 자그맣다. 마침 방학 중이라 교정은 깊은 적막감에 싸였다.

운동장에는 온통 잡초로 더욱 고즈넉함을 더했고, 본관 정면에는 ‘존사애생’이란 글이 흰 페인트 바탕에 붉은 페인트로 씌었다.

존사애생(尊師愛生)이란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은 학생을 사랑하라.’라는 뜻인가 보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는 교육의 가장 기본인 이 ‘존사애생'이 무너져 버렸다.

자본주의와 함께 들어온 물질주의는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되어 사람의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그 때문에 학교 교육조차 왕창 무너진 느낌이다. 나는 이 투박한 '존사애생'이란 글귀가 교육의 처음과 끝을 말하는, 만고불변 진리의 말씀으로 새겨졌다.

사람 교육은 말과 구호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이 케케묵은 구호라도 우리 교육계가 빌어다가 대대적인 ‘학교 살리기 운동’이라도 벌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교문에서 멀찍이 바라보니 교사 정면에 있는 시멘트 훈화대에는 세 명의 소녀가 공기놀이에 빠진 듯, 낯선 방문객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티 없는 얘기도 들어보고 싶었지만, 갈 길도 바쁘고 그들 놀이에 공연한 훼방꾼이 될 것 같아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문명에 찌든 도시 어린이보다 더 순수해 보였다. 순수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다.

시인 윤동주지묘, 봉분 아래 시멘트 축대 부분이 허물어져서 안타까웠다.
시인 윤동주지묘, 봉분 아래 시멘트 축대 부분이 허물어져서 안타까웠다. ⓒ 박도

윤동주의 무덤

윤동주의 생가, 모교를 보았다면 다음은 그분이 영원히 잠든 곳, 무덤을 찾는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조선족 허 기사는 지난해 윤동주 무덤을 가본 적이 있다고 장담하기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유적지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안내인을 잘 만나야 한다. 허 기사는 성품이 상냥하고 밝았다.

명동소학교에서 다시 용정으로 방향을 되돌렸다. 몇 차례 차를 세우고 길가에서 현지 주민에게 물은 끝에 용정현 뒷동산에 있는 중앙교회 묘역을 찾았다.

산은 야트막했다. 날씨가 쾌청한 탓에 승용차로 산길을 오를 수 있었다. 만일 비라도 조금 내렸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진흙길이었다.

“선생님들, 오늘 참 재수 좋은 날이에요.”
허 기사는 날씨 좋은 걸 자신 탓인 양 마구 생색을 내었다.

그는 묘소를 쉬이 참배하게 된 걸 날씨와 자기 탓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했다. 출발 전, 그 날 승용차 삯과 봉사료로 500원으로 계약한 바, 봉오동 전적지를 찾으면 100원, 윤동주 묘지를 오르면 100원을 덤으로 주기로 했기에 그가 나보다 더 기뻐했다.

아무튼 그를 잘 만났다. 답사 여행 중, 안내원이 길을 몰라 헤매면 길바닥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기 십상이다.

산을 오르자 올망졸망한 무덤들이 즐비했다. 모두 고만고만한 무덤들로 수천 개는 넘을 듯했다.

마침 산등성이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 농부에게 윤동주 묘소를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줘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 농부도 조선족이었다.

나는 위대한 시인 무덤 앞에 한참동안 깊이 고개 숙여 엎드렸다. 윤동주 묘지의 봉분은 다른 묘보다 조금 더 컸고, 봉분 아래 부분은 시멘트로 둘러 발라 얼른 눈에 띄었다.

오석(烏石)으로 된 상석 뒤에는 같은 재질로 쓴 묘비가 1미터 정도 높이인데, 앞면은 다시 파서 양각으로 “詩人 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라고 새겼다.

묘비 뒷면과 좌우 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詩人 尹東柱之墓


嗚呼故詩人尹君東柱其先世坡平尹氏人也童年畢業於明東小學反和龍縣立第一校高等科嗣入龍井恩眞中學修三年之業轉學平壤崇實中學閱一歲之功復回龍井竟以優等卒業于光明學園中學部一九三八年升入京延禧專門學校文科越四年冬卒業功已告成志猶未已復於翌年四月負笈東渡在京都同志社大學部認眞琢磨詎意學海生波身失自由將雪螢之生涯化籠鳥之環境加之二竪不仁以一九四五年二月十六日長逝時年二十九材可用於當世詩將嗚於社會乃春風無情花而不實吁可惜也君夏鉉長老之令孫永錫先生之肖子敏而好學尤好新詩作品頗多其筆名童舟云
一九四五年 六月 十四日
海史 金錫觀 撰竝書
弟 一柱
光柱 謹竪


이 묘비명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시인 윤동주의 무덤


아! 슬프다. 시인 고 윤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일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다시 용정의 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으로 전학하였다.

학업을 닦느라 그곳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하였다. 공부는 이미 성공의 경지에 이뤘어도 그 뜻이 오히려 남아서 이듬해 4월에는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형설의 학업 생활은 변하여 새장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게다가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였으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사람됨은 오늘의 세상에 큰 인물이 됨 직했고, 그의 시는 비로소 사회에 울려 퍼질 만했는데 봄바람은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 하였나니 아아, 애석하도다.

그는 하현 장로의 손자이며 영석 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겨 하며 시를 좋아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은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 묘비명은 윤동주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 것으로 그때에는 부모가 모두 살아있을 때였다.

이 비문을 짓고 쓴 분은 명동소학교 학감 김석관으로, 김약연 목사의 뒤를 이어 명동학교 교장이 된 김정규의 아들이다.

그래서 윤동주 연혁 기술이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어린 시절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일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함은 당시 대립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의 추억이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에서 나오는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을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라고 노래한 부분 중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은 그 시절의 추억을 불러 썼을 것이다.

묘지는 사방이 훤히 트인, 남향받이로 팔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윤동주 무덤에서 바라 본 하늘과 산, 그리고....
윤동주 무덤에서 바라 본 하늘과 산, 그리고.... ⓒ 박도
이곳에서 본 언저리 산천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는 이곳을 찾기 전에 윤동주 묘지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서울로 마땅히 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보니 그분은 제자리에 묻혀 있었다. 윤동주는 조국에서보다 이곳에서 더욱 사랑 받고 있었으며, 조선족 동포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대단한 인물로 살아있었다.

또 작품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봉분 아래 부분 시멘트로 둘러친 것이 못내 눈에 거슬렸다.

윤동주를 사랑하는 국내외 동포들이 뜻을 모아 이 자리나, 아니면 생가 뒷산 양지 바른 곳에 터를 잡아 좀더 번듯하게 모셔서 겨레와 함께 영원토록 기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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