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참답게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90년대 중반부터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은 한국 정부의 정책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김영삼 정권에서 본격 제기되고 대두된 '세계화'라는 말을 신자유주의를 실현하는 실천적 개념으로 인식하며, 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미화 포장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도 반신자유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세계사회포럼이 형성되는 등 세계적으로 반세계화 운동이 확산되자 그 개념 정의에 있어서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개념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거나 개념적 차이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개념의 혼란은 곧 실천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가에 따라 문제의 본질에 대한 파악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가 옳게 풀릴 수도 있고 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단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유주의라는 말에 신자가 붙은 것이다. 자유주의라는 것은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자유방임에 의한 이윤추구를 보장하는 경제 정책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재화와 용역의 조화와 균형을 달성하고 최대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는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시장을 왜곡하더니 급기야 공황이라는 최대의 난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의 보완으로 나온 이론이 케인즈주의였다. 즉 국가 개입의 정당화이다.

국가 재정 정책 등을 통한 수요 창출로 자본주의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였지만 70∼80년대를 거치면서 여의치 않자 이후에 대두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흔히 영국의 수상 대처에 의해서 진행된 이 정책을 '대처주의'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그 표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유주의든, 케인즈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자본의 논리를 뒷받침하면서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논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끊임없는 이윤추구 속에서 부의 집중화로 불황과 공황을 오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숨기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느니, 국가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논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든 뭐든 일단 우리는 그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며 자본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이론이라는 점에 시각을 돌려야 한다.

이에 반해 산업자본에서 독점자본, 국가독점자본으로 발전해 가는 자본주의를 보면서 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로 명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의 집중화로 불황과 공황을 오가면서 고통을 수반하는 자본의 병폐를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의 논리이다.

이런 상반된 논리는 결국 누굴 대변하는 논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대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를 자본의 논리에 맞추어 거론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한국 사회는 자본의 논리가 아닌 식민과 매국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이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꼭 한 가지 이론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체에 따라 이윤추구에 필요하다면 자유주의를 외치고 보호주의를 외치고 신자유주의를 외친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WTO(세계무역기구)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불리할 때는 자국무역법인 슈퍼301조를 들이미는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출현과 그 발전 과정은 이윤추구의 목표와 일치되어 있다. 초기의 이윤추구는 왕정 등에 맞서 산업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자유 방임주의인 자유주의가 대두되었다면, 이후 자본은 독점이윤을 추구하면서 이를 위해 군사적 침략과 약탈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자본은 제국주의로 변모하게 되었고 그들이 취한 독점이윤 획득 정책이 식민지 지배 정책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획득을 위한 과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나라들간의 치열한 경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세계 1차, 2차 대전 양상으로 나타났다.

초과 독점을 향한 자본의 지향은 독점이윤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국가 개입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국가권력을 이용한 독점이윤의 보장이라는 필요에 따라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에서 국가 개입을 정당화하는데, 이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 케인즈 이론이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고 난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케인즈 이론은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당시 사회주의의 출현과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이 격화되는 상황이었기에 강력한 국가에 의한 독점이윤 추구를 향한 국가독점자본의 길로 나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나라들간의 동맹 결탁 관계를 맺었다. 그러면서 다자협상 등 다국적기업을 통한 독점이윤 확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다국적기업을 통한 독점이윤 확보는 정책상에서 이중성을 띄게 되는데 독점이윤을 획득하기에 유리한 쪽에서는 문호개방이라는 압력을 넣고 즉 자유무역을 표방하고 불리한 쪽에서는 보호무역을 표방한 것이다. 자유무역을 표방하면서 독점자본의 이익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 정책에 이 신자유주의가 이론적 뒷받침이 된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기회로 더 큰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세계거대독점자본은 결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몇몇 분야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야에서 일국이 아닌 세계적 차원에서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현재 세계 패권을 향한 미국의 움직임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가 바로 세계화 이론이다. 신자유주의가 현대제국주의에서 세계제국주의로 나아가는 과도 상에서 일정정도 독점자본간의 결탁 동맹 공생관계를 허용하는 것이라면, 세계화 이론은 자본간의 공생관계마저도 허물고 세계에는 일인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극단적인 세계 유일 패권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다면 현재 자본의 논리는 신자유주의 이론이 아닌 세계화 이론에 의해 뒷받침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신자유주의는 국가독점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국가독점자본과의 관계에서는 일정부분 이해관계의 공통성이 존재했다면, 세계화 이론은 세계 유일 세계거대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먹히느냐 마느냐 하는 치열한 갈등과 대결이 주되게 나서게 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이론은 각기 다른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역에 있어서도 차이가 현격히 드러난다. 국가간의 관계에 있어서 신자유주의는 주되게 경제 영역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세계화 이론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문화 영역도 세계 유일의 문화만이 생존할 수 있고, 현재 사회에서 뜨겁게 이야기되고 있는 교육분야도 이에 벗어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다. 방식에 있어서도 국가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이론은 일정정도 다자협상을 중심으로 독점이윤을 추구한다면, 세계화 이론은 다자가 아닌 유일한 일인자인 세계거대독점자본의 독점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패권 지향이 된다.

일인 패권에 도전하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와 민족이든 누구든 막론하고 짓밟게 된다. 다자협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인자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신자유주의 이론이 아닌 세계화 논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으로는 유엔까지 무시하는 미국의 일방적 이라크전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개방의 요구가 경제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 분야로 확대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세계거대독점자본의 직접적인 수탈 양식을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계거대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론으로서 세계 유일 패권의 논리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라와 민족이든 관계없이 세계 일인자가 모든 패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극악무도한 약육강식의 논리이다.

세계화를 잘 이해하는 것은 변화된 세계제국주의의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세계제국주의의 이론적 뒷받침이 다름 아닌 세계화 논리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논리는 이론이 아니라 세계제국주의의 실천적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세계화 정책은 일국의 약자들만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민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논리에 따라 동맹 결탁한 제국주의 나라들인 프랑스, 독일 등까지도 유일 패권을 지향하는 미국과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는데 앞장서는 기수가 되고 있다. 세계거대독점자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은 모든 방면에서 세계거대독점자본에게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침탈을 당하게 되었다.

세계화 정책으로 대다수의 서민들이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에서 세계화의 반대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실은 세계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한국에서 올바른 실천적 대안과 지침을 제시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 민의 지향에 동참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쓰고 있는 것은 이런 세계적 상황과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의 진원지인 서구에서도 반신자유주의 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99년을 기점으로 반세계화 운동으로 대부분 전환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과 세계화라는 개념적 정의를 잘 구분하고 이해하여 실천적 대안을 찾는 것은 현 시대적 요구이다. 전 세계의 민이 반세계화로 단결하는 현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이해한다면 현실을 인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많은 오류와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분명하게 세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