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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된 성벽과 붉은 꽃이 조화를 이룬다.
오랜된 성벽과 붉은 꽃이 조화를 이룬다. ⓒ 이종원
읍성에 올라서서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 돌면 극락길이 트인다'라는 고창읍성에 올라서본다.

병사대신 형형색색의 꽃들이 성둘레를 지키고 있어 읍성을 방어하고 싶어도 꽃향기에 취해 쥐고 있는 무기를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사방 어디를 올라서도 시원한 눈 맛이 보장된다. 특히 서쪽으로 올라서면 이 성이 고창읍내를 아늑하게 보듬고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황토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랄까..

고창읍성

성둘레가 1684 m로 한시간 정도 발품을 팔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과 달리 산을 끼고 있어서 한 바퀴 도는 것이 만만치 않다. 다리가 뻐근함을 느낄 정도니까 매일 거닐다 보면 다리병이 낫는다는 말은 그저 전설로만 그칠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 읍성이지만 산성으로 불러도 좋을 듯 싶다. 낙안읍성이 초가집으로 가득차 있고. 해미읍성이 일제때까지 민가들로 가득차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도무지 민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순전히 행정 군사적인 목적에서 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성 동쪽에서 바라보면 고창에서 백양사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인다. 내륙과 해안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말해준다.

성밟기

성밟기..제 아버님이 자리를 잡기 위해 하루를 꼬박새고 찍은 사진입니다.
성밟기..제 아버님이 자리를 잡기 위해 하루를 꼬박새고 찍은 사진입니다. ⓒ 이종원
단종원년(1453년) 외침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고 한다. 이 큰 성을 여자들의 힘만으로 쌓았다는 전설이 들린다. 그 전설을 반증하듯 오늘날까지 성밟기 풍습은 여자들만이 그 퍼포먼스를 연기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창지방에서만 보여진다고 하는데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인네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풍습은 차가운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최고의 의식일 것이다.

답성놀이를 통해 여러 효과를 얻는다. 성을 돌면서 호국의지를 다지고, 몸무게에 돌무게까지 더해 성터를 굳게 다지게 한다. 이고 온 돌은 성 입구에 쌓아두어 해빙기때 성터에 틈이 생길 경우 요긴하게 쓰여진다고 한다.

집단 행사를 통해 군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일체감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 갈수록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에 빠지는 현실을 개탄할 때 이런 집단놀이야말로 친밀과 협동의 장이 될 것이다.

답성놀이할 때는 전국에 내노라하는 사진작가들이 하루 전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할려고 경쟁이 치열하다. 오로지 이 한 장면을 앵글에 담기 위해서다.

막돌을 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돌이 잘 지탱할 수 있도록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돌이 숨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막돌을 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돌이 잘 지탱할 수 있도록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돌이 숨쉴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이종원

맹종죽림
맹종죽림 ⓒ 이종원
맹종죽림

진서문에서 다시 산길로 올라가면 시원한 바람이 탐승객의 땀을 식혀준다. 바로 이 대나무 밭에서 불어온 바람이다.

부리나케 올라보니 다리통만큼 굵은 대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땅에는 큼직한 죽순이 자라고 있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일명 '맹종죽림'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 1938년 유월선사가 이곳에 보안사를 세우고 그 운치를 돋구고자 조성한 대나무란다. 보안사는 간 곳이 없고 대숲소리가 그 아쉬움을 토해내고 있다.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면 이번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한결같이 허리가 휘어져 있는데 근처 동리생가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가락에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 이렇게 굽었다고 한다.

모양지관

소나무 밭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큼직한 건물이 나온다. 기단이 상당히 높아 이곳이 관청건물이었음을 말해준다. 현판엔 '모양지관'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달려있다. 성이름이 '모양성'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안에는 임금님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있으며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경사와 굳은 일이 생길 때마다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고 산다.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성안에는 여러 관청건물이 자리 잡고 있고, 큼직한 소나무가 성을 둘러싸고 있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성안에는 고인돌까지 있어 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동리 신재효 고택
동리 신재효 고택 ⓒ 이종원
동리 신재호 생가

읍성앞에는 동리 신재효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동리는 판소리를 집대성했으며,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판소리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문학형식으로 정리한 분이다. 관약방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아버지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전국의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봐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쳤고 오늘날 판소리 여섯마당의 문학적 체계를 만들었다.

동리를 통해 남자들에게 불리었던 판소리가 여창 진채선, 허금파 등을 육성하였고 우리 여인네의 한의 감정을 가미시켰다. 그리하여 고창은 판소리의 고장이 되었으며, 인간문화재인 만정 김소희까지 이어진다. 생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왠지 우렁차게 느껴진다.

생가 옆에 '고창판소리 박물관'이 있으며 동리의 사설집과 유품 그리고 우리 판소리를 이끄어온 명창들의 계보를 살필수 있다.

- 맺는말

낙안읍성은 초가집이 즐비하지만 이미 상업화에 물들었고, 해미읍성은 대패로 밀어내듯 뻥 뚫려버린 운동장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고창읍성은 나무와 꽃이 피어있고 건물들이 복원되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년 성밟기를 통해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어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까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리의 판소리 가락이 흘러나오는 고창읍성.. 다시 찾고픈 곳이다.

여행메모

1) 가는법

서울-서해안고속도로-고창IC-5분거리 (3시간 30분소요)
고창읍내에 있음

2) 입장료

어른 770원 /청소년 400원/ 어린이 220원
주차비 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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