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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제공)
'토론의 달인'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한 사람은 저명하고 날카로운 패널들이 아닌 한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였다.

5월 1일 밤 노 대통령이 출연한 MBC 100분 토론에서 방청객 질문 시간에 "서울 당산초등학교 5학년 4반 담임을 맡고 있는 새내기 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배성옥씨는 "이 자리에 나 혼자만 온 것이 아니라 우리반 아이들의 마음을 담아서 왔다"며 노끈에 묶인 편지 꾸러미를 들어보였다. 배씨는 "이 편지 꾸러미의 내용은 우리반 아이들이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노 대통령께 바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의 질문은 이랬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적으면서 우리반 아이들이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려면 평화가 제일 필요한데, 얼마 전 이라크 전쟁에 대해 아이들이 상당히 많이 궁금해했습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MBC 100분 토론에서 (노 대통령을) 만나게 되니까 그때 내가 대표로 여쭤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저희 반 아이들에게 학급 담임선생님이 되셨다고 생각하시고,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어렵다"며 웃음을 보인 노 대통령은 한참을 생각했다. "아마 저라면… 내가 지금 그 학생들의 선생님이라면…" 노 대통령은 조금 더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대통령으로서 공개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스튜디오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패널 중 한명이 "피해간다"라고 말하자 노 대통령은 "예, 피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질문을 한 배씨는 "한마디 더 부탁을 드리면, 정성스럽게 쓴 우리반 아이들의 편지를 토론이 끝나고 읽어주시면 대단히 고맙겠다"며 "선물로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질문 마이크는 다음 방청객에게 넘어갔고 노인복지정책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배씨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던 듯하다. 노 대통령은 다음 질문에 모두 답한 후 "미안하다, 조금전 배성옥 선생님의 말에 답변을 잘 못했는데 한마디 더 하겠다"고 말했다. 사회자인 손석희 아나운서가 "제일 어려운 질문이었죠"라고 묻자 노 대통령은 "그렇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그 아이들에게 김옥균 선생과 함께한 개혁당 분들의 소위 '갑신정변'을 어떻게 가르치고 계신지요. 그리고 병자호란 시대에 최명길 선생과 김상헌·윤집·오달제·홍익한 등 삼학사의 노선 두 개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가르치고 계신지요. 또한 해방 이후에도 많은 선택이 있었는데, 김구 선생의 단정 불참을 어떻게 평가하고 가르치고 계신지요. 선생님, 어떤 선택대로 말씀을 하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정답이 있겠습니까?"

노 대통령의 말은 답변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자신의 고민과 하고싶은 말이 담겨 있었다. 노 대통령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명분을 내세웠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한 사람들을 거론하며 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손 아나운서가 "답변을 한번 들어…"라고 하지 노 대통령은 만류하며 "질문 형태로 드리는 답변으로…"라며 웃었다.

수많은 토론을 거친 노 대통령이 지금까지 토론 중 가장 당황해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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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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