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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4시 시청 앞, 미사일 모양의 박이 매달린 25톤 기중기 뒤편 하늘로 비둘기떼가 날아오른다. 환경재단, 한국여성단체연합, 참여연대, 문화연대, 환경운동시민연합, 종교환경회의 6개 단체가 마련한 틱낫한 스님 방한 기념 전국민 평화염원대회가 열리고 있다.

가수 이은미의 노래와 강원룡 목사님, 일면스님의 평화 메시지가 이어졌고, 금호고속 전세버스에서 내린 틱낫한 스님 일행이 경호원과 사진기자들에 둘러싸여 막 무대에 오른 참이다.

베스트셀러 '화'의 저자이자 '세계 평화의 상징'인 틱낫한 스님은 19박 20일간 한국에 머문다. 방한 일정 내내 함께 한다는 금호고속 기사 문병옥씨는 행사 이후엔 숙소(홍제동)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인자함이 풍기는 얼굴에 여행 중에도 명상을 즐기는 것이 인상적이다. 20명의 수행스님들과 항상 함께이길 원하셔서 주최측에서 따로 마련한 미니밴도 물렀다. 오늘 경호는 네 명이 맡았다"고 알려줬다.

폭력의 야만성을 고발한 영화 '킬링필드'에 쓰이기도 했던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이 울려퍼지고 안내방송이 잇따른 오후 2시 시청앞 광장은 썰렁했다. 경찰의 교통통제선은 차량통행을 늘리며 조절되었다. 주최측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10만 시민의 참여를 기대했었다. 현장의 시민 도우미까지 합쳐 자원봉사자는 약 200명 쯤 될 거라는 양은숙 환경운동연합 간사는 인사동과 대학로 곳곳에서도 반전평화집회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오늘의 썰렁함을 풀이했다.

시민들이 모이길 기다리다 예정보다 20여분 늦게 퍼포먼스 난타 공연이 시작됐다. 배우 유인촌씨의 사회로 세 곳에 설치된 법고 연주와 묵념, 영화배우 안성기, 문소리씨의 평화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김용택 시인의 시 낭독과 월남참전용사 이윤기 작가의 평화를 위한 고백 순서가 지나고 사회자 마이크는 여성, 인권행사 전문사회자 최광기씨가 잡았다.

장사익, 안치환씨의 노래 공연 전후로는 박원순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과 이오경숙 한국여성연합 대표의 평화 메시지가 있었다. 장사익씨는 "손에 피를 묻히고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며 파병반대, 전쟁 지지철회를 호소했다.

설치 전문업체 신텍스의 한승훈 팀장에 따르면 무대는 9명이 새벽 4시부터 4시간 걸려 만들었다. 60평 무대 좌우에는 각각 3톤 가량의 14단 스피커를 매단 기중기가 서 있다. 음향장비의 출력은 보통 야외행사의 5-6배쯤 될 거라는 진행요원의 설명. 대형콘서트 전문 음향업체 소속으로 행사 전반의 음향 상태를 감독한 사운드 엔지니어는 "이 정도의 전문공연 시스템이라면 설치에 대개 2-3일쯤 걸린다. 오늘 새벽 5시부터 세팅을 시작해서 시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전문가 입장에선 만족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듣기엔 괜찮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포구 상암동에서 온 참전용사"라고 밝힌 조경대(73) 할아버지는 틱낫한 스님의 침묵명상이 한참인 시각, 무대전방 70m에 위치한 카메라 설치대 위에 올라가 소리치고 있었다. "니들이 전쟁을 알어? 나라를 위한다면 빨리 해산해!". 올라가 말리던 사복 차림의 경찰관계자가 뛰어내리자 따라서 뛰어내려 주변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틱낫한 스님 일행의 걷기 명상과 시민들의 제자리 걷기가 끝난 직후 스님 일행이 전세버스로 향하는 무대 바로 앞에서도 소란이 있었다. 중년의 사나이가 피날레 인사말을 하려는 최열 환경재단 상임이사에게 시비를 걸며 시선을 끌었다.

아내 심재명 대표, 딸아이와 함께 온 명필름의 이은 감독은 "국익을 위해서 전쟁에 동참하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솔직히 부끄럽다. 딸아이에게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면, 결과와 상관 없이 이번 전쟁이야말로 21세기 인류가 평화로 나아가는 가장 의미있는 교육의 계기여야 할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로부터 희망을 보고 우울함을 달래려고 나왔다"고 밝혔다.

경찰은 2-3천, 진행요원은 5천쯤으로 파악한 시민들이 전쟁반대를 외쳤다. 미사일 박이 터지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STOP WAR!!"라 적힌 붉은 천이 휘날렸다. '아침이슬'과 평화를 기원하는 북소리를 끝으로 광장은 삽시간에 도로로 변해버렸다.

경찰의 신속함으로 장비 철수에 위험과 불편이 따르자 총진행을 맡은 황금명륜 여성연합 기획국장은 "5분만 막아달라는데 그걸 못해주냐"고 경찰에 불만을 토로했다.

황금명륜 국장은 "애초 29일로 예정됐는데 전쟁발발로 앞당겨진 행사였다. 단체들이 의기투합해서 며칠 밤새며 준비했지만 행사 규모나 의의, 장소의 이점에 걸맞는 준비기간을 가질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로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모인 사람들에게서 여느 반전집회와는 느낌이 다른, 정말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 자세를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엑기스 같은 이들의 전체적인 에너지를 느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기도를 했다. 대다수의 발걸음이 광화문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은 흩어져 갔다. 시청 앞 도로 한편에선 비계용 강관 파이프(아시바)와 덧마루를 해체하고 음향장비를 철수하는 작업이 분주하다. 우리의 저녁 하늘은 고요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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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 기자만들기 과제 수행을 위해 가입함. 일기체, 수필체로 할 수 있는 잡다한 이야기. 주관심사는 사람과 문화. 근성이나 사명감은 거의 맹물 수준. 훈련을 통해 오마이뉴스의 다양성과 열린 진보 사회를 위한 실뿌리로서 역할을 다하며 의미있게 살다죽길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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