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1일 금요일 밤 11시 5분 영등포역, 꽃샘추위 아니랄까봐 손끝까지 에이는 싸늘한 바람이 자꾸만 외투깃을 여미게 한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더니 이처럼 쌀쌀한 바람 불어오는 날에는 따뜻한 봄향기 깃든 남쪽 바다가 그립다.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에 올라 탄 내 마음은 이미 저 한반도의 남쪽 끝 부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야간열차라. 기차 안에는 빈 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이 깊은 밤 홀로 묵묵히 어둠속을 달릴 이 기차를 탄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

막연히 나처럼 시간 절약해서 바다를 보고싶어하는 즉흥적인 여행객, 아니면 보다 짜릿한 밤샘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이 대다수일거라는 생각도 잠시, 내 시야속에는 모두 바쁜 일을 마친 후 피곤한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고 황급히 잠을 청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생동감 넘치고 즐거운 분위기를 기대했던 나에게 이러한 부산행 야간열차의 풍경은 의외였다. 그만큼 세상 살기가 각박해졌다는 사실에 갑자기 씁쓸한 감정이 복받친다.

그만큼 열차 속 분위기는 우리들이 마주 보며 정겹게,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특히 좌석을 마주보게끔 돌린 후 7살정도 되어보이는 여자 아이를 데리고 우리 팀 맨 안쪽으로 들어온 여인과 그 아이의 피곤에 찌든 모습에는 그냥 죄인이 된 듯한 심정으로 조용히 잠을 청하는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대전역에서 빈자리를 발견한 우리는 황급히 새자리로 옮겼고 기존의 자리는 조심조심 정면을 바라보게끔 되돌려놓았다. 그랬더니 이 여인, 쾌재를 부르면서 안고 있던 아이를 옆좌석에 내려놓은 채 더더욱 처절한 꿈의 나라로 직행했다.

동대구역에서 내린 이 모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다. 얼굴에 은가루를 뿌린 범상치 않은 아이의 외모를 보건대 혹시 이 아이는 아역모델이 아닐까? 밤샘 촬영을 마치고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우리의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차는 이 사람들의 제각각 삶의 모습을 껴안고 육중한 쇠덩어리를 매단 채 무정하게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해운대 갈매기를 마중하며...

▲ 깔끔한 조각상 너머 보이는 아침 해운대 바다는 도시적인 냄새가 진하다.
ⓒ 김정은
새벽 3시 40분 부산역광장은 그 어느 곳의 새벽보다 더 활기에 넘친다. 해운대 근처 찜질방으로 직행해서 한 4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 다음, 근처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나섰다.

늘 느끼지만 해운대 바다는 매우 도시적인 냄새가 진하다.
뉴질랜드에서 동네 앞만 나가면 늘상 볼 수 있는 공원같은 바다, 한국에서 그와 비슷한 바다를 찾는다면 바로 해운대라 할 만큼 이 바다에는 구조물도 많고 사람 손도 많이 탄 바다이다. 그렇지만 규모만큼은 전국에서 두 번째라 해도 서러울 제 1의 해수욕장 아닌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면 뉴스마다 "해운대 해수욕장 100만 인파 운집"이라는 멘트를 했고 그 멘트가 바로 얼만큼 더웠는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해운대는 추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최대의 해수욕장임에 틀림없다.

저만큼 해운대 모래사장 초입에서 새우깡을 파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일명 갈매기먹이라는 새우깡을 지리적인 위치 탓에 슈퍼보다 비싼 가격인 800원에 팔고 있었는데 참 아이디어 하나 끝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삼아 새우깡을 허공에 던지니 새우깡 냄새를 맡고 어디선가 갈매기들이 떼거지로 모여들었다. 그 모여드는 기세가 어찌나 무섭든지 마치 히치콕의 영화 '새'에서 공포스럽게 달려드는 새들을 연상할 정도였다. 아무리 이 갈매기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새우깡만 먹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새우깡을 향해 돌진하는 폼이 예전 석모도 가는 배 안에서 던진 새우깡을 먹으러 오는 갈매기 떼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게 억세보인다.

그만큼 갈매기 사회에서도 생존경쟁이 극심하다는 것일 게다. 빠르고 강한 갈매기는 새우깡을 먼저 나꿔채서 포동 포동 살이 찌고, 그렇지 못한 갈매기는 괜히 헛물만 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왠지 먹지못한 갈매기가 불쌍해 그쪽 방향으로 새우깡을 던지면 맨날 제일 처음 먹던 갈매기가 어느새 와서 그 갈매기가 보는 앞에서 얄밉게 새우깡을 채가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인간사회도 이제 생존경쟁이 더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생존 자체를 할 수 없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는 동물의 세계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만 그보다는 현재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동물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원한 전망의 달맞이 고개

▲ 달맞이 고개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부산 앞 바다.
ⓒ 김정은
해운대를 지나 아직 동백이 피지 않은 동백섬을 둘러보고 달맞이 고개에 오른다.

달맞이 고개는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서 와우산이라 불리는 언덕길의 별칭인데 신혼여행객이나 연인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 행복하게 산다는 속설이 있어 사랑의 고개로 알려져 있다. 이런 속설이 생기게 된 것은 옛날 사냥꾼 총각과 나물 캐는 처녀가 정월 대보름에 기원을 하여 부부가 되었다는 전설 때문인데 굽이 굽이 도는 언덕 중간 중간 저 아래에는 시퍼런 바다와 어촌동네가 마치 성냥갑처럼 오밀조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인지 이곳에는 특히 분위기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다. 담쟁이 넝쿨로 온통 뒤덮힌, 이 고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언덕 위의 집'이라는 카페를 들어가서 목조 테라스 위 귀여운 철제의자에 앉으니 저 너머 시원한 바다가 한눈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관 속에서라면 맹물만 마셔도 그 맛이 각별할 터인데 하물며 향긋한 모닝커피와 함께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 고개에는 보너스로 벼락부자 스토리가 떠돌고 있다. 그 내용인즉, 지금은 이렇게 각종 음식점으로 번성하고 있는 이 금싸라기 땅이 5공 시절만 해도 민간인에게 불하되지 않던 국유지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불법용도변경이 문제가 되어 국가에서 서둘러 개인에게 불하하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문제가 많은 땅이다 보니 아무도 이 땅을 구입하려하지 않아 몇 번이고 유찰이 되다 결국 한 택시운전기사에게 평당 10원(?) 꼴로 팔리게 되었는데 매입 후 이 땅이 규제가 풀리면서 졸지에 이 운전기사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가 되어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만일 사실이라면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된 것보다 더한 대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해프닝 모두 국가 시스템이 투명하지 못해 나타난 틈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틈새를 잘만 이용하면 졸지에 부자가 되기 쉬웠고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자라는 사람들이 이 틈새를 잘 이용한 전력을 가지고 있기에 보통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 시스템이 매사 투명하고 안정되어 더 이상 틈새나 요행이나 권력의 비호에 의하지 않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정말 부자가 되어 사람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불안한 영혼들의 휴식처, 송정 해수욕장

▲ 해안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바라본 송정앞바다, 파도 소리가 불안한 인간의 도피본능을 일깨운다.
ⓒ 김정은
잔잔한 해운대 바다와는 달리 이곳 송정 앞바다의 물결은 검푸르고 거셌다. 검푸른 바다가 거세게 주변의 바윗돌을 덮치고 나면 하얀 포말이 되어 부서져버린다. 그 자극적인 파도소리가 가슴 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인간들의 도피본능을 일깨운다.

송정 바다를 끼고 도는 해안도로를 지날 때 바다와 맞닿아 있는 허름한 민박들을 보면서 문득 도피해서 이곳에 잠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안에 누워있으면 밤새 자극적인 파도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고, 낮에는 한산한 어촌의 분위기가 가슴을 서글프게 하는 이런 곳에서 며칠동안만 살다보면 매사 반성하고 내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문득 같이 온 친구들에게 농담을 건넨다.
"꼭 영화 속에 나오는 도피처같지 않니? 부모님의 허락을 얻지 못해 집을 나온 가련한 연인들이 도피해서 어딘가로 정처없이 흘러들어가 밤을 지새우는 곳말야..."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진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실소를 금치못했지만 내 말이 허당이 아닌 것이 이 송정 앞바다에서 아직 개봉은 안했지만 이런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이후에 알게 되고나서 역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매우 다른듯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별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저만치에서 무당인듯한 사람들 여러명이 모여 해신제를 지내며 양손을 모으며 무언가 간곡히 기원하고 있다.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 한해의 평안, 뱃길의 평안, 그도 아니면 스스로의 평안...

아예 무당옷을 입고 걸판지게 해신제를 지내면 볼거리가 많을텐데 그냥 보통 아주머니 처림으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니 더 간절해보인다. 간절한 기원을 하는 무당들을 뒤로 한 채 바다 위의 절이라는 해동 용궁사로 직행했다.


한가지 소원을 이루는 곳, 해동 용궁사

솔직히 부산에 오기전 범어사는 들어보았어도 용궁사라는 절은 처음 들었다. 더군다나 명칭 자체가 사찰같은 은유적인 품격이 없고 마치 음식점 이름이 연상될 정도로 매우 직설적이라서 왠지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안보면 후회한다는 말 때문에 그냥 보기로 한 터였다.

▲ 해동용궁사 다리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꿈 속에서 관음보살이 보였다는 곳이다.
ⓒ 김정은
바다위의 절이라는 닉네임 대로 해동 용궁사는 양양의 낙산사처럼 검푸른 바닷물이 바로 발 아래서 철썩대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고려시대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 화상이 경주 분황사에서 수도할 때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하루는 꿈에 용왕이 나타나 봉래산 끝자락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가뭄이나 바람으로 근심하는 일이 없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보문사(普門寺)라 하였는데 불행히 임진왜란중에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 운강화상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절의 명칭을 기존의 보문사로 하지, 하필이면 용궁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 참에 절 이름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 절은 1974년까지 보문사라는 명칭이었으나 1974년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백일기도중 꿈 속에 하얀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오색광명을 놓으며 용을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관음보살이 현신했던 꿈 속 그 바다속에서 불상이 건져 올려지는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기에 사찰이름을 海東龍宮寺라 바꾸었는데 그후부터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현몽을 받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신령스러운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 앞마당에는 "한가지 소원을 이루는 곳"이라는 명패가 큼지막하게 달려있었다. 정말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질까? 전국의 절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절이 바로 돈냄새 풍기며 금칠을 하거나 새롭게 조악한 단청을 하고 으리으리하게 새로 건물을 지어 예전 절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절들인데 이 용궁사는 불행히도 내가 싫어하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바다를 관통하는 으리으리한 화강암 석재 다리에서 풀풀 풍겨나오는 돈냄새 하며 입구에 늘어서있는, 크기만 할 뿐 별 감흥이 없는 12지신상하며 미리 삼대 관음도량이라는 절의 창건일화를 듣지 않았다면 중앙에 서있는 마을 어귀의 해신각처럼 보이는 오래된 용왕당을 보면서 원래 절이 아닌 곳을 일부러 절로 만든 것이라는 오해를 할 만큼 절로서의 고풍스런 느낌은 없었다.

▲ 해동 용궁사 내에 있는 오래된 용왕각, 절이 아니라 어느 어촌 마을의 해신각처럼 보인다.
ⓒ 김정은
그냥 바다경관이 좋다는 생각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득남불이라 씌여진 조각상이었다. 모습은 부처라 볼 수 없고 달마상같아 보이는데 얼핏 부산지역에 유통된다는 모회사 소주의 마스코트와 흡사한 느낌이 드는 배불뚝이 배와 코가 유난히 맨질맨질하고 검게 닳아 있었다. 그 이유인즉 이 조각상의 코와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이렇게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 해동 용궁사의 득남불, 그곳을 만지면 득남하다는 속설때문에 유난히 손 때가 검게 탄 배불뚝이 배와 코가 우리네 이웃의 순박한 마음을 담은 것같아 친숙해보인다.
ⓒ 김정은
이쯤 되면 우리나라사람들의 현세구복적인 성향은 정말 못말릴 수준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제주도 돌하루방의 코가 남아나지 않고 전국의 부처 콧등이란 콧등이 남아나지 않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이러한 보통 아낙네들의 순박한 마음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득남불이라는 명패를 붙이는 절의 행태가 괘씸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의 결과로 손때가 탄 이 달마상의 모습만큼은 왠지 솔직하고 순박한 우리네 이웃의 솔직함을 담고 있는 것같아 친근해보인다.

고단한 노동의 댓가, 함짓골 절영해안산책로

기장 앞바다를 바라보며 회로 점심식사를 한 후 영도쪽으로 넘어갔다.

영도하면 사람들은 뭐니뭐니해도 추억의 영도다리를 먼저 떠올린다. 예전 영도다리는 배가 지나갈 때마다 번쩍 들리다보니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지만 지금은 예전 기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번쩍 들리는 영도다리를 더 이상 보지못한다는 말에 괜히 아쉬움이 커졌다.

지금은 쓸모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고장만 안났으면 하루에 한번씩 여행객들의 볼거리를 위하여 정기적인 시간에 올렸다 내렸다 하게 해달라면 무리한 요구일까?

지금 이곳을 온 이유는 바로 절영 해안산책로를 보기위해서이다. 바로 영도의 옛이름이 절영도라는 사실에서도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이 산책로는 영도대교를 지나 영선동 아랫로타리에서 제2송도 바닷가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절영 해안산책로의 입구인 관리동이 보이고, 그 아래에 동삼동 중리 해변까지 이르는 장장 3km의 해안 산책로가 펼쳐져 있다.

▲ 절영해안산책로 내려가는 길
ⓒ 김정은
▲ 절영해안산책로에서 쳐다본 모습, 오른쪽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깍아지르는 절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 김정은
과거에는 지형이 가파르고 험난한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으나, 관광진흥의 목적으로 조성한 일종의 인공 산책로인데 우리는 촉박한 시간 때문에 전 코스를 걷지는 못하고 함짓골에서 시작해서 동삼동 중리해변까지만 걷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다보니 인적은 별로 없는데 갑자기 웬 아저씨가 쓱 나서더니 차비가 부족하니 100원좀 달라는 것이다. 순간 " 아, 이곳 혹 산책하기 위험한 곳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그러한 걱정도 잠시, 오른쪽으로는 대마도와 송도 쪽으로 향해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왼쪽에는 깎아지르는 기암절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곳곳에 인공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구조물과 일일이 수놓듯 정성을 기울인 보도불럭 하며 매우 정성이 들어간 산책로였다.

물론 산책로가 평지로 밋밋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라인을 살려 만들었기 때문에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걸어가다 보면 발은 아프지만 굽이굽이 거닐 때마다 경치가 달라지고, 인공으로 조성된 아기자기한 벤치에 앉아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파도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이, 피곤해진 심신을 다스리는데는 그만이었다.

▲ 절영 해안산책로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양의 수도꼭지
ⓒ 김정은
그러나 이러한 단정함의 이면에는 고단한 노동의 댓가가 숨어있었다. 보도블럭을 걸어가다 보면 조그만 자갈돌로 '1999'라는 숫자도 보이고 오륜마크도 보이고 아마추어가 대충 그린 것같은 아이와 아버지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띈다. 도대체 이 보도블럭 속에 새겨져 있는 자갈돌의 의미가 뭘까 궁금해하던 차에 이 산책로 조성경위를 듣고나니 언뜻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바로 이 사업은 1997년 IMF가 터지면서 실업자들이 양산되자 실업자도 구제할 겸 태종대와 연계한 관광자원도 개발하겠다는 목적에서 1999년1월부터 하루 260명, 연 인원 11만명을 동원해 2년동안 벌인 대대적인 공공근로사업의 일환이었던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산책로 조성을 위해 IMF로 직장에서 쫓겨나 졸지에 실업자가 된 수많은 아버지들이 차마 말 못하는 아픈 가슴을 담은 채 하나 둘씩 이 보도블럭에 무늬돌들을 새겨놓았을 것이다. 일 하다가 문득 저 앞의 바다를 바라보면 괜히 서럽기도 하고 가족생각도 말 터인데 그 때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단란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이와 아버지 모습을 새기지는 않았을까?

앞 뒤의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면서 고단한 삶들의 땀이 묻어있는 보도블럭을 걸어가다 보니 저 앞 바위에서 부지런히 낚싯대를 돌리며 바다낚시에 열중하고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세월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흐르고 있고 아픔도 어느덧 치유되면서 그러한 세월이 순응하고 사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연륜의 바다 태종대와 경쾌한 바다 조도

절영 해안산책로를 지나 태종대를 유람하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예전 국사책에서 나온 조개껍데기 가면으로 유명한 동삼동 패총박물관을 지나 태종대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흔히 태종대를 유람선에서 보면 70%의 절경을 볼 수 있고, 유람선이 아닌 육지에서 태종대를 보면 30% 정도밖에 본모습을 볼 수 없다지만 아쉽게도 손님이 없어서 유람선을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유람선 관광을 포기하고 태종대로 향했다.

▲ 태종대 앞바다, 해송과 어울려져 있는 수려한 해안경치는 새월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 김정은
태종대는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성취한 후 전국의 명승지를 탐방하던 중 이곳에 들러 궁인들과 함께 울창한 수림과 수려한 해안절경에 심취된 후 잠시 소일하며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을 처음 와봤다면 탁 트인 망망대해를 바라다 보며 시원해 했겠지만 절영해안산책로를 실컷 보고 온 터라 푸른 바다만으로는 뭔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연륜을 알 수 있는 해송들과 어울려 굽이치는 파도와 등대는 또다른 연륜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그럭저럭 일주도로를 따라 전망대에 다다르면 모자상 조각이 서있다.

일설에는 이 모자상 조각은 신사임당으로서 바로 이 곳은 사람들의 자살사고가 많다고 해서 유명한 태종대의 자살바위가 있던 곳인데 자살하기 전 어머니를 한번 더 생각하라고 신사임당 조각상을 놓았다고 했다.

그래도 요즘에도 가끔씩 자살사건이 발생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 고등학생이 이곳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나뭇가지에 걸리는 바람에 천운으로 살아났다고 하는데 왜 그 학생은 그다지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려 했을까?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류시화, 자살중에서)"


물론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덜 힘들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난 만큼 세상은 부딪쳐가며 자기 생만큼 살아야 할 의미가 분명히 있으며 어쩔 땐 바로 그 의미를 찾고자 사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자살 바위를 뒤로 한 채 자동차는 태종대를 나와 한국해양대학이 있는 섬, 조도로 향했다.

태종대 유람선을 타면 들리게 되는 이 섬은 대학 캠퍼스와 바다가 어울어진 매우 특이한 구조인데 건물 뒤쪽으로 가면 검푸른 파도가 갯바위를 향해 힘차게 물기둥을 내뿜는 경쾌한 바다를 항시 바라볼 수 있다. 태종대가 연륜의 바다라면 이곳은 젊은 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때마침 저녁노을이 어스름하게 밀려와 하얀 포말의 바다와 어울려 주변 모두를 그윽하게 만든다. 풍경도, 사람의 마음 속도...

▲ 한국 해양대학이 있는 조도앞바다의 석양풍경, 힘차게 하늘을 찌르는 물기둥이 경쾌하다.
ⓒ 김정은
저녁 노을이 진 조도 앞바다, 파도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밀려와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위로만 솟구치는 기개 넘치는 하얀 물기둥이 되었다가 다시 잔잔한 포말로 되돌아간다.

그만큼 조도 앞바다는 경쾌한 젊음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자연에 순응하는 유연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연에의 순응... 말은 쉽지만 말처럼 되지 않는 것이 순응이라는 두 단어일 것이다.

이름없는 파도도 처음에는 자기 그릇을 모르고 위로 위로만 한없이 솟구치려 하다가 할 수 없이 자기의 본분으로 되돌아갈진대 하물며 욕심 많고 생각 많은 인간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누구나 다 한가지 이상의 꿈이 있고, 세상 살다보면 수백가지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내려갈 곳이 없을 것처럼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고 싶지만 결국 자기의 본분과 그릇을 알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기까지 수많은 패배감과 실망감을 느낄텐데, 많은 수업료를 내가며 인생에서 순응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기까지 우리네 인간은 아마 평생을 걸려도 모자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갈치 시장과 영화의 거리 밤기행

▲ 저물어가는 영도 앞바다,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선박들이 하루의 끝을 알린다.
ⓒ 김정은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가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자갈치 시장은 항상 저물지 않은 활기와 생동감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제는 깜깜해져 보이지 않는 밤바다 위로 손님을 맞이하는 전등불빛만 비치고 포장마차에서 제각각 손님을 기다리는 꼼장어가 껍질을 벗기운 채 꿈틀대고 있었다.

아직 꼼장어 철이 아니라 이곳에서 지금 파는 꼼장어는 중국산이라는 소릴 듣긴 했어도 발갛게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벌건 양념의 꼼장어가 입맛을 돋군다.

넓은 만큼 복잡하기도 한 곳, 세상이 지치고 힘들어지면 자갈치 시장으로 와보라고 했던가?

자갈치 시장 길거리 대야에 펄펄 뛰는 활어만큼 이 곳의 삶도 각자의 그릇에 담긴 채 고단하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위해 펄펄 뛰고 있었다.

자갈치 시장을 건너면 극장가가 밀집되어 있는 영화의 거리가 나온다.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도 가끔 나오는 영화인 손조각이 새겨진 광장도 보이고, 푸짐하고 다양한 길거리 노점먹거리들이 입맛을 돋우는 이곳은 꽤 늦은 저녁시간인데도 젊은이들로 늘 붐비는 것같았다. 좁은 골목 앙쪽으로 낯익은 노래방이며, 비디오방 같은 간판이 줄서있고 간간히 주점과 음식점, 제과점, 커피전문점들이 늘어서 있어 서울의 여느 거리와 비슷하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게 부산 특유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로만 북적이는 골목길을 걸어보는 것도 꽤 오래된 것처럼 우리는 이 생동하는 분위기에 취해 마냥 쏘다니며 걸었다.

걷다보니 밤 11시, 어느새 서울행 밤기차를 타고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부산역에 내린 우리, 밤 기차를 타고 내일 새벽이면 서울에서 내려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서울행 밤 기차를 기다리며 난 약간은 초조하고, 약간은 피곤하고 처량한 기분으로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지나간 내 생애에 어쩌면 매우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부산에서의 기억이 나른한 꿈결 속에 한 편의 시처럼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기차는 오지 않았고
나는 대합실에서 서성거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옷을 입은 역수만이 고단한 하루를 짊어지고
플랫폼 희미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조급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어서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오르기를 바랐다.
산다는 것은 때로 까닭을 모를 슬픔을
부여안고 떠나가는 밤열차 같은 것.
안 갈 수도, 중도에 내릴 수도.

다시는 되돌아올 수도 없는 길.
쓸쓸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언제나 연착했고, 하나뿐인 차표를
환불할 수도 없었으므로

기차가 들어 오고 있었고
나는 버릇처럼 뒤 돌아다보았지만
그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끝내 배웅도 하지 않으려는가.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이정하,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1)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