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까지 한국의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앞 철길과 다리 아래에서 자행되었던 피난민 학살사건을 우리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정전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주지하듯이 방어능력없는 노약자와 부녀자, 젖먹이 아이들에게 가해졌던 미군의 폭력은 1999년 9월 AP에 의해 전세계로 타전되었지만, 정작 피해자들에게는 50여년 전부터 너무도 명백했던, 평생을 따라 다니며 상기되곤하는 잊혀지지 않는 비극적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 노근리 피난민 학살사건이 2001년 1월에 발표된 미국 국방성과 한국 국방부의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보고서로 상당부분 종결되었다고 판단할 지도 모른다. 만일 진정 그렇다면 이 번에 번역출간된 최상훈·찰스 헨리·마사 멘도자/남원준 옮김, 〈노근리 다리〉(잉걸, 2003.1)을 굳이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진실, 정의, 우리의 기본인권이 존중받길 원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말이다.

〈노근리 다리〉가 증언하는 기본 줄기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간 충북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앞 철길과 다리 아래에서 영동 주곡리, 임계리와 타지에서 남하중이던 피난민들이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과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 2대대병력의 집중사격에 의해 사냥감마냥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26일 최초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약 100명, 그 후 쌍굴다리와 그 근처에서 300명 정도가 죽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접수된 사망자의 83%가 노약자나 부녀자, 아이들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희생자들은 대부분 힘없는 민간인들이었다.

노근리에서 학살이 시작되던 날인 1950년 7월 26일 교황 피우스12세가 로마에서 공포한 "가장 큰 슬픔"이라는 제목의 반전 칙령에서 교황은 "우리가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전쟁은 파괴와 슬픔을 비롯한 온갖 참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군대와 함대만이 아니라 무고한 아이들과 엄마들, 무력한 노인들까지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학살이 가능했을까? 저자들은 저서에서 두 측면으로 이 학살사건의 필연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첫째, 학살의 가해자였던 게리오언(Garryowen) 제7기병연대는 부대 자체가 19세기 인디언 토벌대로 창설되어 '빛나는' 무훈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다, 도쿄에서 점령군이자 사실상의 맥아더 총독친위대로 군림하면서 전투훈련은 물론 전투지역 피난민 처리지침도 이수하지 못한 보초수준의 준비되지 않은 풋내기 군대였다는 사실에 있다. 또 여기에 사병은 물론 장교마저 '국(gook)'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흰옷입은' 모든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북한 인민군에 대해 막연한 군사적 우월 콤플렉스(전쟁이 아니라 치안활동으로 간주)을 가짐으로써 정작 전장에서는 허둥대고 겁에 질려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인민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하거나 끼어서 침투하고 있다는 무성한 소문은 말그대로 전투다운 전투경험이 없었던 제7기병연대 그 자신의 속내였던 셈이다.

둘째,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공격은 실수가 아니라 염연히 일관된 군사작전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미 제8군의 피난민 통제지침인 "언제 어떠한 피난민도 전선을 넘어오게 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나 제5보병사단장 킨의 7월 27일 명령인 " 이 지역에 보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 당시 대구에 주둔한 미 제5공군 전방지휘본부의 작전참모부장 터너 로저스의 "육군은 미군진지로 접근하는 모든 피난민들을 우리 공군이 기총공격할 것을 요청했다"는 진술 등은 미 퇴역군인의 증언과 일치하면서 노근리 학살사건 이후에도 적용된 확고한 방침이었던 것이다. 득성교와 왜관교의 파괴로 인한 학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다.

결국 이렇게 보면 노근리에서의 학살은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에서 세 가지로 구분(작전으로서의 학살, 처벌로서의 학살, 보복으로서의 학살)했던 학살유형 가운데 첫 번째인 작전으로서의 학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직접 읽어보면 알게되듯이 단지 이상의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여기에는 피해 당사자인 정은용, 박선용, 정구헌, 정구학, 양해숙, 양해찬, 전춘자, 박희숙 등 수많은 한국인들의 한(恨)많고 생생한 "걸레 같은"(정은용이 자신의 인생을 자학적으로 표현한 것) 삶이 손에 잡힐 듯 녹아있다. 그야말로 몇 번의 눈물을 훔치지 않고서는 읽어내기 힘들 정도이다. 나 역시 책을 거듭 접어버릴 정도로 안에서 분출되어나오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극한 상황에서 피난민들이 보인 공포와 비겁함, 의무와 헌신, 살고 싶은 욕망과 죄책감 등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갈등하는 모습은 너무도 마음아팠다. 특히 폭격으로 거의 빠져 매달려 있는 자신의 눈알을 스스로 빼야만 했던 양해숙과 얼굴 안면이 뭉개져버린 정구학의 사연, 노근리에서 발생한 일을 한국 경찰관에게 신고하려한 13살 어린 박창록과 창수 남매의 '기나긴' 여정은 심장을 저리게 했다. 또한 이 책에는 피해 당사자와 마찬가지의 제대후 불면증·악몽·분노에 시달린 가해 당사자인 레너드 웬젤과 랠프 버노타스, 아트 헌터, 멜번 챈들러, 길먼 허프, 수이 리 등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까지 자행되었던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앞 철길과 다리 아래의 피난민 학살사건에서 쌍굴속에서 숨을 죽인 채, 또는 의식을 잃은 채로 살아남은 사람은 불과 25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 미군에 의해 구조된 사람들도 있었다. 왜 미군은 학살하는 동시에 구조하기도 했을까? 과연 '미국의 두 얼굴' 가운데 진실한 얼굴은 어떤 것일까? 박선용의 말처럼 아마도 그 당시 미군은 미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을까? 여기에는 분명 정답이 있다.

아트 헌터의 고백대로 그는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인 노부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쏘았다. 샤르트르가 말했듯이 머리와 얼굴이 다른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린 잘린 돼지머리를 머리로 볼 뿐 얼굴로 기억하진 않는다. 희생자의 눈을 직시하고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자는 이미 사람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종차별적 시각이라는 물리적 거리외 심정적 거리가 놓여져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베트남 미라이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월리엄 콜리의 말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이념을 죽이러 한국에 왔기 때문에 '흰옷입은' 한국인들을 능히 소·돼지 취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희숙의 얘기처럼 미군 퇴역군인들이 명령에 따랐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더라도, 그래도 그들은 참회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다 그런 것 아니냐, 전쟁통에 사람 죽는 거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노다 마사아키가 〈전쟁과 인간〉(원제, 전쟁과 죄책)에서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와 복종에 대한 실험 결론으로 뽑아낸 '복종에 대한 정리 9가지'를 분석하면서 드러난 바와 같이, 명령이므로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권위의 시스템화로 인해 결국 전체 권위에 순종하게 되므로 실행자의 책임이 조각(阻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반공(反共)에 찌든 일부의 한국인은 혈맹국인 미국의 군인이 저질렀다는 그 학살사실을 못내 믿으려하지 않거나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한 부득이한 일탈의 하나로 치부한다. 만일 진정 그렇게 여긴다면 그 역시 노근리 학살사건의 은폐자이자 공범자일 뿐이다. 정은용의 아들 정구도가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 이 일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직접 사람들에게 호소하게된 이유가 바로 그들의 힘없고 여린 목소리를 들어 줄 올바른 귀를 우리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지배하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귀라는 명제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전쟁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대량학살 범죄는 엄연히 인류에 대한 죄이다. 이제 다시 책을 통해서나마 진실, 정의, 기본인권이 존중받길 원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함께 진실하지 않은 것, 정의롭지 못한 것, 기본인권이 말살되는 것들에 대해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노근리 다리 - 한국전쟁의 숨겨진 악몽

최상훈 외 지음, 남원준 옮김, 잉걸(200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