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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동상담 시간에 4절지 한 장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미술치료의 하나였다. 앞 장에는 머리 속 생각이 복잡한 나를 그렸다. 뒷장에는 밑부분에는 녹색 비슷한 색깔, 중간 부분에는 분홍색, 윗부분에는 빨강색 비슷한 색깔로 칠을 했다. 완성하고 나자 환타지 그림 비슷한 그림이 되었다. 3개월 전 어느 날 보았던 잊혀지려고 하는 잊혀지지 않는 노을이다. 그 노을 속 어딘가 내가 있다. 왜 이 그림이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몽골리아의 울란 바타르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6004km를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Trans Mongolian) 9호차 1번 침대에 나는 지금 앉아 있다. 마린스크를 지나서 타이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시간이 7월 7일 오후 8시 45분. 7월 5일 오후 2시에 기차를 탔으니까 55시간째 기차를 타고 있다. 6월 14일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천진까지, 천진에서 버스로 북경까지, 북경에서 버스와 기차로 울란바타르까지, 울란바타르에서 기차로 모스크바까지...모스크바에서 상페떼쩨부르크를 거쳐서 핀란드로 그리고 최종 목적지 오스트리아까지 간다.

시베리아를 달리던 그 기차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은 얄팍한 답답함이었다. 모두들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했던 그 러시아에 나는 이미 들어 와 있고 내가 내릴 곳 모스크바에는 아는 사람 하나, 갈 곳 하나 없다. 어쨌든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고 나는 불안함을 느끼다 안 느끼다 가끔 정차하는 기차마냥 그 불안함이란 멈췄다 달렸다를 반복한다.

기차여행은 즐겁다. 4명이 한 칸을 쓰는데 2개의 이층 침대가 있다. 지금 내 앞에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집에 간다는 독일인 변호사 덕크가 책을 읽고 있다. 덕크는 자기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다.

기차에는 주로 몽골 보따리 장수들이 많다. 중국에서 물건을 싸게 구입해서 시베리아를 건너고 기차가 정차하는 곳마다 장이 선다. 10분, 길게는 25분 동안 러시아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몽골 사람들은 물건을 판다. 4박 5일 동안 기차 안의 사람들은 친구가 되어 생일 파티도 하고 술잔도 기울인다.

아침에 눈을 뜨니 세계에서 가장 깊다는 바이칼 호수가 눈에 들어 왔다. 눈을 떠서부터 오후 2시가 되도록까지 열차는 호수에 가까이 갔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호수 끝에 구름이 말려 있는 것 같은 곳도 있고, 안개가 자욱해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의 끝이 궁금해지는 곳도 있고, 홀로 낚시를 드리운 할아버지, 수영을 하는 가족들, 그저 잠잠하기만 한 마을, 아스팔트나 시멘트가 깔리지 않은 평평히 잘 닦여진 2차선의 흙길. 한참동안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 이어졌다. 같은 박자의 기차 레일 소리가 한참이나 반복되고 나서 해가 지기 시작한다.

나는 지는 해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의 들판을 가로질러 수풀사이로 달려오는 저 하늘빛과 해빛이 나의 영혼을 목욕시키고, 정신을 새롭게 하고, 그저 나를 적시고 있다.

비가 내린 뒤 차창과 들판과 수풀은 젖어 있고, 하늘은 내린 비에 태양이라는 붓을 적셔 수채화를 그려 놓은 듯 찬란하다. 시베리아의 여름밤은 언제서야 오고야 마는 것인지 나는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해가 뜨고 지는 일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설레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에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오래도록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었다. 4박 5일 유쾌한 횡단여행의 순간의 무료함이 나의 시선을 차창 밖으로만 내몬 것도 결코 아니었다.

벌써 오래 전, 들판은 침묵의 예를 갖추었고, 하늘은 지는 해의 아름다움에 제 온 몸을 담그었다. 아무 소리도 아무 불빛도 없고, 반 평 남짓 차창 너머의 하늘 빛, 레일 위 기차 소리만이 요란하다. 나는 차마 입도 벌리지 못 하고 들판의 침묵에 동참한다.

아! 시베리아는 찬란하다. 지는 해와 하늘은 황홀하다. 밤이 깊었건만 잠도 오지 않고, 얕은 밤만이 그칠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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