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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테잎을 빌리러 갔다.
열 서너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만화영화들이 모여있는 곳 앞에 앉아있었다. 혼잣말을 중얼중얼 하는 걸로 봐서 자폐아인것 같았다. 옆에 남자어른이 서있었기에 우린 영화 고르는 데 열중해있었다.

한참 후에 아르바이트 여자의 애써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 너 거기서 뭐하니?"

별 반응 없이 비디오 테잎들을 주루룩 주루룩 훑으면서 장난치는 아이에게 아르바이트 여자는 "그런 건 피아노 학원가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역시 화를 참는 듯한 목소리로 아이를 꾸짖고 있었다. 잠시의 사이를 두고 앉아있던 남자애는 "약속지켜!" 하면서 아르바이트 여자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보호자로 알았던 남자는 가고 없었고 아이는 혼자인 듯 했다. 남편은 안고있던 하은이를 내게 넘기고 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자는 눈이 찢어져라 아이를 째려보고 있었고 아이 또한 여자를 보며 계속 "약속지켜!"하는 소리를 조용히 반복하고 있었다.

"이 애는 장애인인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빨리 집에 연락하는 게 좋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한 쪽으로 데리고 가서 혹시 미아방지용 팔찌나 목걸이는 없는가, 의사소통은 가능한가를 알아보는 동안 아르바이트 여자는 볼멘 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좋게 좋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여긴 장사하는 곳이고 저런 애들은 무서운 꼴을 봐야 정신차려요"

나는 하은이를 안고서 "저... 자폐아인것 같은데 의사소통이 쉽진 않거든요"했더니 아르바이트 여자는 "저런 애들이 자주 와요. 7942라고 여기 질나쁜 애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어요." 여자는 카운터에 서있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에게 "7942에 박진규라고 검색해서 연락해봐요"하였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박진규선생님은 신림사거리에 있는 가출 청소년 쉼터 '우리세상'의 선생님이다. 여자는 쉼터의 아이들과 정신지체장애인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그 아이를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이광호였다.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은 광호네 집에 전화를 해서 "여기 영화마을인데요 광호가 와있는데 데리러 와주셔야겠어요"하는 짤막한 통화를 끝냈다.

광호는 계속 비디오대여점 안을 돌아다니며 선반들을 밀었다 당겼다하거나 테이프들을 꺼냈다가 다른 곳에 집어넣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런 저런 말들을 걸며 광호의 행동을 제지했고, 사나운 아르바이트생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광호네 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엄마 올거야"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려는 광호를 남편은 제지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남편은 다시 광호네 집에 전화를 했다. 광호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 전화를 했더니 엄마는 어디에 있는 영화마을인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듯했다. 신림사거리에 있는 영화마을이라고, 찾아오는 길을 설명하던 남편은 "아...광호가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구요?"하며 몇마디 더 하곤 전화를 끊었다. 광호는 곧 밖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영화를 골라 계산을 했다. 사나운 아르바이트 여자는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저런 애들은 따끔하게 무서운 맛을 보여줘야 다시 안 온다구요"

광호의 엄마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게에 들어온 엄마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사과를 한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됐든 사나운 아르바이트생은 정신지체장애인인 광호가 '우리세상'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마도 다섯번이 넘는 동안 남편과 나는 정신지체장애인과 가출청소년의 차이를 설명했음에도 여자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광호가 떠난 다음,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에 기뻐하는 것같았다.

집에 돌아와 남편은 다시 광호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10분 전쯤에 가게에서 나갔으니까 기다려보세요"
전화를 끊은 다음 남편이 말한다.
"태평스러운데. 자주 있는 일인가봐"

처음 광호가 아르바이트 여자와 실랑이를 했을 때 그 때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훨씬 빨리 끝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괜한 짓을 하였다. 우리는 여자에게 정신지체인에 대해서 이해시켜주고 싶었다. 또 우리는 어쩌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광호에게 보호자를 찾아주고싶었다. 그러나 광호는 행색이 지저분했지만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고 엄마도, 동생도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괜한 짓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또다시 같은 반응을 할 것이다.

관악장애인센터의 상훈씨가 3박 4일동안 거리를 헤매고 다녔을 때,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채 까맣게 탄 입술로 지하철 역에서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미아방지용 팔찌를 차고 있는 상훈씨가 좀 더 빨리 집으로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집 앞 경찰서에 하루도 빠짐없이 3~4건씩 붙어있는 정신지체장애인을 찾는 전단지를 볼 때마다 우린 상훈씨와 상훈씨의 부모님을 생각한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 자폐. 집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길어져 옷에 때가 묻고 머리가 헝클어지면 홈리스라고 생각하게 되는. 가게에 퍼질러 앉아있으면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 그리하여 누군가가 적의를 드러내며 호통을 치면 무서워서 슬그머니 떠나는.

세상이 아름다운가.
스스로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사람들만 있어서 세상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병든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약물 중독이든, 가출 청소년이든, 그리고....자폐든 선하신 하느님은 모두에게 영혼을 주셨다.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없는 다양한 영혼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그렇게 다르고 다른 영혼들이 모여서 이 세상은 아름답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은 아름다운가.

씁쓸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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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제작공동체 푸른영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 여성, 가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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