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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이 필요한 이유

▲ 1월 11일 (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주최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에서 파란풍선을 든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1일과 19일 양일 동안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주최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가 서울의 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수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이 집회에서 길자연, 김장환, 김홍도, 조용기, 최해일, 지덕, 이만신 등의 기도 인도자들은 북한의 핵개발 중지와 NPT 탈퇴 철회, 주한미군 철수반대, 반미감정 자제, 국가발전, 평화통일,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다.

이날 집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국민일보>는 이 집회가 한국 사회 내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기도회라고 해석하였으나 <오마이뉴스>는 촛불추모에 맞선 미군철수반대기도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처럼 집회의 성격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는 이 집회를 주도한 사람들의 의도가 복잡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간의 평화를 말하면서도 극도의 냉전적 증오심을 표명하는가 하면, 확인되지 않는 낭설을 기도의 내용에 포함시킴으로써 스스로 이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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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 집회의 가장 큰 목적은 한국 사회에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미국의 친구로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집회의 주최자들은 이러한 입장의 표명이 현 단계에 있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사회라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집단이 있는 게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고 또 집회를 가질 수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들의 주장을 분석하고 반박함으로써 이들을 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한 단계씩 성장해 간다.

문제는 아직 이 토론의 폭이 넓지 않다는 데 있다. 예컨대, 필자와 같은 평범한 기독시민이 보기에 이 집회를 둘러싼 토론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고 편견에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집회로 촉발된 기독교 혐오증을 가라앉히는 의미에서 한국 기독교를 위한 변명이 한 마디쯤 없을 수 없다.

▲ 11일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에서 '미국은 우리의 우방' '미군철수반대'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는 참가자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국 기독교와 관련된 몇 가지 상식들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도대체 종교로서 기독교의 특징이 무어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이라고 기독교는 가르치고 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돌려대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의 사회에 던진 가장 큰 충격이었다.

물론 많은 고등 종교들도 사랑, 자비, 혹은 인(仁)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서로의 차이는 그러한 윤리적 명령의 근거에 있다. 어떤 종교들에서는 이를 자신의 수행이나 학습이나 깨달음의 결과로 얻는 데 비해 기독교인들 혹은 크리스찬들은 살아있는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랑의 실천 안에 다양한 윤리적 덕목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상식에 해당한다. 예컨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속성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을 세부적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기준은 유용하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임을 표방하면서도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불공평한 짓을 수시로 저지른다면 그는 가짜 기독교인이다. 그가 목사라면 가짜 목사이고 기독교 지도자라면 가짜 지도자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는 그의 성명서에서 이번 집회를 주도한 목사들을 한국 기독교 내의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이라고 불렀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사회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근대적 병원과 학교와 고아원을 지었고 각종 시민단체들을 창단하였으며 한국 사회에 서구적 민주주의와 남녀평등과 복지체계를 소개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도대체 온갖 핍박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된 쪽복음을 들고 산골과 도서를 헤매고 다녔던 기독교의 권서(勸書)들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의 문맹률이 그렇게 급속히 낮아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경제정의와 공명선거와 대북구호 활동에 깊숙이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집회를 주최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소속 교회들조차도 북한 주민들의 구호를 위해 막대한 헌금을 보내고 있는 정도이다.

▲ 지난 18일 한기총 서울시청 앞 대규모 기도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종교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곧 타락하게 된다는 점도 일반적 상식에 속한다.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에서 관찰하였듯이, 한국의 기독교도 짧은 시간 안에 극히 우려되는 타락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타락의 일반적 과정은 돈을 좋아하고, 성직자들을 우상화하고, 교리에 집착함으로써 결국은 종교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는 소위 매개의 변증법이라는 현상이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기독교는 군사독재체제 하에서의 세속적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대 교회를 만들면 좋은 교회 좋은 목사로 인정받는 성장제일주의, 목사를 성직자로 받들고 그의 말에 대해서는 무조건 아멘을 강요하는 사제주의적 권위주의, 다 종교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교리와 어긋난다 해서 단군상의 목을 자르려 드는 종교적 광신주의 등이 한국 기독교 내에 풍미하게 되었다. 이번 집회를 주최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한국 교회 내에 그러한 경향의 총 집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 친미인가, 반미인가

한국의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친미적인가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어쩔 수 없는 역사성이다. 우선 한국의 기독교를 주도하는 개신교들이 주로 미국을 통해 전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단순히 포교하였을 뿐 아니라 봉건적 잔재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근대적 자유와 복지를 소개하고 공급하는 통로로서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인들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우호의 역사를 반세기가 넘게 각별히 유지해왔다. 한국 기독교의 다수는 당연히 친미적이다.

한국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일반을 두고 보아도 친미적 경향은 불가피하다. 예컨대, 조선은 미국에 의해 일본제국주의 치하를 벗어났고 대한민국은 미국의 후견으로 성립하였다. 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훈련을 받았고 미국적 문화와 가치의 긍정적인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미국의 시민들과 친분들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한국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미국의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45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은 한국에게 약 150억 달러어치의 유무상 원조를 실시하였다.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 마샬 플랜의 총액이 170억 달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지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앞으로도 무역과 투자와 기술 교류에 있어서 가장 긴밀한 관계가 요청되는 나라이다. 1950년 여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의 도움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래에 있어서도 원교근공(遠交近攻) 혹은 영토적 야심을 기준으로 볼 때 미국은 가장 믿을 만한 군사적 우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 19일 오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제2차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에 참석한 신도들이 태극기, 성조기, 유엔기를 흔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미 관계를 보는 두 종류의 극단적 부류들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을 자본주의의 총본산 즉 악의 본산이라고 믿고 미국이 어떠한 행동을 하든 미워하는 부류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을 선의 총체로 보고 미국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다 옳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다. 둘 다 몰지각한 엉터리 주장인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입장과도 매우 거리가 멀다.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의 나라 이외에 지상의 어떤 국가도 완전히 선이거나 완전히 악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이 지상의 모든 체제는 불완전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에게 있어서 친구가 되는 최고의 기준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 여부이다. 이러한 행동을 할수록 더 친해지고 이러한 행동을 안 할수록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만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에 대해 역사적 이유로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면 미래에 있어서 이러한 기독교적 기준의 적용은 더욱 중요하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의 오류에 무조건 동참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을 함께 걱정하고 교정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

이번 시청 앞 집회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혹자는 이 기도회가 '기도'하는 모임이었고 민족 복음화나 세계 선교와 같은 주제도 다루지 않았느냐고 말할지 모르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반미주의 반대와 미군철수반대가 집회의 핵심적 목표였다는 점은 피차에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이처럼 매우 정치적인 주제로 기독교적 대중집회를 가질 때는 여러 가지로 주의해야 한다. 특히, 평소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비판하면서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정교분리를 강력하게 외치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 집회를 주도한 목사들은 너무도 명백하게 이러한 오류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주제를 둘러싼 진실을 그 집회의 주도적 목사들이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진실의 하나님이며 거짓을 증오하고 거짓과 오류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해 반드시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기독교인들은 믿고 있다. 그러므로 신을 들먹이면서 특정한 정치적 주제를 다룰 때는 반드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이라는 기준으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신의 저주를 자초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몰지각한' 지도자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전공하고 있는 기독교의 가장 평범한 본질에 있어서는 평신도보다도 덜 이해하고 있으면서 나머지 모든 세상일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육학과 정치학과 법학의 전문가들 앞에서 조금도 거리낌없이 학교 교육과 국제 정치와 민주적 법치에 대한 지침을 설교하고 있다.

대체로 이 지침의 대부분은 설교하는 그 날 아침 혹은 그 전날 아침에 본 신문, 특히 매우 왜곡된 정보를 거리낌 없이 활자에 담는 그런 종류의 신문들에서 나온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이러한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몰지각한' 목사들일수록 너무 바빠서 전문적 독서나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교회 안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배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공평과 정직의 기준으로 보아 2002년에 발생한 북한핵문제에는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몇 가지 국제정치적 상식을 생각해보자. 우선 북한의 김정일 정부는 극악무도한 정권이라는 점이다. 이 정부는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세습정부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을 굶겨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정권의 안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군사분야에 쏟아붓고 있다.

이 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정권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공산권이 무너지고 주변의 동맹국들이 다 돌아선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슴도치 전략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핵무장이라는 가시를 세움으로서 미국이라는 사자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자는 전략이다. 잡아먹을 수는 있으나 그 고기에 비해 가시에 찔리는 번거로움이 훨씬 더 크기에 그냥 코앞에서 놀더라도 참고 보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미국이 자신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상식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동북아 전략의 일부이며 세계전략의 극히 작은 부분이다. 만일 미국이 세계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이 필요할 때 중동과 발칸과 한반도는 가장 명분을 찾기가 쉬운 지역이다. 물론 미국인들 다수는 평화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은 도덕적일지 몰라도 그 개인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정책은 부도덕할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의 체제적 입장으로 보아 소련의 붕괴로 국민을 단결시킬 외부의 위협이 사라졌다면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군사비를 유지하거나 증액시킬 수 있다. 군사비 투자가 레이저 광선이나 우주기술 개발과 같은 위험이 크고 장기투자를 필요로 하는 경제 활동과 맞물려있다. 국제적으로도 최고로 인기가 없는 북한 김정일 체제와의 전쟁은 미국으로서 매우 기꺼운 일이 될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북한이나 미국이나 심지어 우리 자신일지라도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국가는 없다. 국가란 집단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어떤 정부는 이 필요에 보다 부응하고 어떤 정부는 덜 부응할 뿐이다.

기독교도들이 헌금을 모아 북한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보내는 이유는 북한 정부가 좋아서가 아니라 인애의 마음 혹은 측은지심 때문이다. 이것은 신의 명령이다. 반면에 각 국의 외교관들이 피차간 웃는 얼굴로 만나서 회담을 하고 여러 가지 원조를 주고받는 것은 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서로간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핵문제는 기독교적 입장으로 파악하기 힘든 복잡한 국제정치적 사건이다. 그야말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져 있는 큰 줄기만 따라가자면 먼저 1994년 10월에 합의된 '북미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이 합의의 핵심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는 대신 2003년까지 경수로형 원자로를 제공하고 그 기간 동안 50만톤 규모의 중유를 공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합의체결 후 3개월 이내에 무역과 투자에 대한 미국의 제한을 해제하고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의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 핵 비확산 체제 강화를 위해 피차에 노력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누가 이 합의를 먼저 어겼는지가 흥미롭다. 미국은 북한이 이 합의 직후부터 다른 방법으로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왔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미국이 당연히 지켜야할 바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표면상으로 제네바합의를 어긴 것은 미국이다. 2003년에 완공해야 할 원자로는 아직도 요원하며, 무역과 투자에 대한 제한도 해제하지 않았고, 핵무기 불사용에 대한 공식 보장도 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2002년 1월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했을 뿐 아니라 1월에 의회에 보고한 '핵태세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핵선제공격을 명시하였다. 미국은 그 해 10월에 켈리 특사의 방북 때 북한이 핵개발을 시인했다고 주장한 것이 위기의 시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0월에 발생한 사건은 1월에 발생한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최근 미국 언론들은 북한이 이미 1997년도부터 파키스탄으로부터 농축우라늄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핵개발을 시작하였고 2001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농축우라늄은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아마도 그럴 수 있다. 미국 언론들이 분석한 대로 부시행정부는 오로지 전선을 이라크로 집중시키기 위해 사실을 숨겨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공화당은 이미 집권 전부터 클린턴의 민주당 정부가 북한에게 원자로 공급을 약속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게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우라늄을 활용하도록 허용하고 미국은 지속적으로 핵개발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신에 완전히 핵시설을 제거하고 북한을 화석연료에 의존하게 만들면 북한을 통제하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점도 개진된 바 있다.

즉 민주당 치하의 제네바합의를 무효화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부합된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개진되고 있었다. 어떤 방향이든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회부하여 다뤄야할 객관적 사실들을 국익 때문에 왜곡하고 있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어 있다.

한국 정부가 대화에 의한 해결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국익 때문이다. 한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주 먼 극동지역에서 일어나 일시적 사건이겠지만 한국민으로서는 또 수 세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비극이다.

따라서, 전쟁회피는 한국 정부의 가장 당면한 목표이다. 남북한이 평화공존하는 게 차선이고 평화통일하는 게 최선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북한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3단계의 기존 노선이다.

여기에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미국과 적극 공조하여 북한을 압박하여 설사 전쟁을 치르더라도 신속히 붕괴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노선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분간 후자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기존 노선의 유지가 어려워질 때를 감안한 준비도 충분히 있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서의 미국과 어느 정도 공조는 불가피하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미국의 이익만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특히 미국 부시 행정부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너무 다르다. 아마도 남북한과 미국이 각자의 국익을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현 단계의 정부 정책들을 비교해 볼 때 그래도 한국의 대화 추구 정책이 가장 기독교적 이상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보수, 수구와 한국 기독교

한국 기독교의 다수는 보통 보수적 혹은 보수 신앙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 말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여기에서 보수적 혹은 보수 신앙이란 기독교의 교리적 내용들, 예컨대, 삼위일체나 역사적 예수, 동정녀 탄생, 성경의 영감계시설 등을 그대로 믿는 태도를 말한다. 신앙적 보수와 정치적 보수는 동일한 현상이 아니다. 더구나 보수와 수구는 반드시 구별되어야할 개념들이다.

진정한 의미의 보수란 역사적 진전과는 관계없이 반드시 지켜야할 만한 가치나 체제의 내용을 가지는 태도이다. 반면에 수구란 그것이 무엇이든 현재 혹은 바로 이 전에 자신이 가졌던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예컨대, 한국 헌법의 정신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반면에 군사독재체제를 그리워하고 그 체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수구적이다.

그러므로 보수란 용어는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반면에 수구란 용어는 부정적으로 사용된다. 물론 그 구분이 쉽지 않다.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헌법을 사수하겠다고 소리치면서 군사독재를 찬양한다면? 그는 보수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 보수란 명칭을 도용하는 수구적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 기독교의 일부가 이러한 사람들과 혼합되어 버린다면 이는 한국 기독교의 장래를 위해 극히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도 상당히 일관성이 있다. 그들의 관점들을 상호 연결시켜보면 북한은 기습 남침의 의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위해 휴전선 전역에 걸쳐 수십 개의 땅굴을 파고 있고, 이 땅굴로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수십만 벌의 한국군 군복을 수입하였으며, 수만 명의 고정 간첩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북한측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전략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주장이 자기충족적이라는 점이다. 안기부와 국방부과 관련 연구기관들은 이미 이들의 주장이 근거없다고 판정하고 있다. 몇몇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언론들도 이들의 문제 제기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만일 이 기관들의 결론이 여기에 침투한 고정간첩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면 그들의 주장이 공식적으로 증명될 기회는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은 민간 단체 차원에서 증명되거나 인정되어야 할 터인데 이들은 주요 민간 단체들 대부분에도 고정간첩들이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입증은 결국 불능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확인할 수 없는 온갖 루머들이 마치 굉장한 고급 정보인 것처럼 이들 사이에서 회자하고 있다. 예컨대, 남북정상회담 시에 김정일이 달리는 차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거나 김정일의 책상 위에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명단이 있다는 식의 루머를 어떤 목사는 공공연히 설교 시간에 설파하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이러한 최상급의 북한측 정보가 어떻게 그 목사에게만 전달될 수 있었는지는 흥미로운 일이다. 루머는 때로 예상치 않은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예컨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시위가 청와대의 모 인물이 자금을 대고 친북 조직들에서 인원을 동원한 결과라는 루머는 친미시위를 촉발시킨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기독교인들은 신의 품성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실천을 삶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은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니까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일을 행하고 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항상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그래도 목표는 그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몇 가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진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자신의 기존 사고를 정당화하는 정보만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건전한 시민이라면 그 한계를 극복하도록 노력하고 정보의 통로를 다양화하는 게 필요하다.

예컨대, <조선일보>만 볼 게 아니라 <한겨레신문>도 보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가능하면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 매체에도 접촉하는 게 좋다. 만일 특정한 문제에 관심이 있으면 바로 뛰어들 게 아니라 그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 견해를 먼저 청취하는 게 유익하다.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도록 힘을 합치는 일이 시급하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통로를 활용하여 진보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미국민들에게 한국인의 정확한 의사를 전달하는 게 필요하다.

대체적으로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자국민들에게조차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시민들에게 서로 가장 가까운 친구임을 알리고 결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미국의 공화당 정부가 일방적이고 모험적인 정책을 버리고 대화에 응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들과 같은 극우적이고 폭력적인 조직들이 나타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 테러 활동을 주도하는 극우 민병대는 지금 약 800개를 상회하고 있으며 1995년 4월의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 사건과 수십 건의 우편폭탄 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테러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만일 현재 관찰되고 있는 몇몇 극우적 인사들이 민주적이고 중도적인 사회 분위기에 절망을 느끼게 되면 폭력적 행동으로 나설 우려가 크다. 이미 어떤 월간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이번 선거에 절망을 느낀 나머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군사쿠테타를 선동하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내란의 선동을 금지하는 형법 제90조를 위반하는 행위로서 명백히 처벌의 대상이다. 기독교 정신과는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극히 유의해야 한다.

부산의 집회는 그만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서울 집회의 성격이 한국 기독교에 유해한 것으로 판단되는 상황에서 부산 집회를 추진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우리 모두가 싫어하는 한국 사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만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특히, 교회 신도들을 차량으로 동원하는 일은 그만두는 게 좋다.

이제 한국 사회는 자발적 사회로 전환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조차도 차량을 통한 동원이 자취를 감추는 판에 한국 기독교만 차량 동원의 구습을 연출할 필요가 없다. 한국 교회 신도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한다. 신앙적 문제라면 몰라도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사의 견해를 무조건 따르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된다. 기독시민으로서 반드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먼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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