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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성과를 보고한 뒤 구호를 외치는 방미투쟁단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12일 오후 8시 인천국제공항. 시민사회단체 회원 30여명이 10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방미투쟁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방미투쟁단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출구 앞에 섰지만 정작 주인공인 투쟁단은 나타나지 않는다. 조용한 공항은 "살인미군 처벌하라" "US Troops, Out of Korea"를 외치는 마중나온 사람들의 구호로 활기를 띄었다.

수속이 늦게 끝난 방미투쟁단은 오후 8시 30분경에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선 방미투쟁단 단장 한상렬 목사가 들고 있는 부채에는 직접 피로 쓴 '민족자주' 네 글자가 선명하다.

한상렬 목사는 6일 오전 130만 국민서명 백악관 전달에 앞서 결의를 다지며 혈서를 썼다. 그러나 백악관 측은 서명 전달을 저지했고, 한 목사는 손가락의 심한 출혈을 무릅쓰고 백악관 앞 1인 단식농성을 진행하다 잠시 쓰러지기도 했다.

'지속적 투쟁, 미국내 여론조성' 과제로 남아

▲ 방미투쟁단을 마중나온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출구 쪽을 향해 소파개정과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방미투쟁단은 백악관 서명전달은 물론,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면담, 미 국방부 방문 등도 성사하지 못했다. 대신 미국내 시민사회단체와 재미교포단체와의 연대를 성사시켰다. 특히 미주 교포들 사이에서는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사건 해결을 위한 미주지역 대책위가 결성되었다.

이들을 반갑게 맞은 문정현 신부는 "나도 미국에 가봐서 그 곳에서 어떤 푸대접을 받았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문을 열었다. 문 신부는 "투쟁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한국에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투쟁단은 민족의 큰 자존심을 세웠다.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김종일 여중생 범대위 집행위원장은 "부시 미 대통령에게 12월 14일 범국민대회 전까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고 보고하며 지속적인 투쟁과 미국사회 내 여론조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 정부 관료들은 한국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하더라"며 "한국정부는 미국 정부보다 약해 눈치를 보지만 한국 사람들은 부시보다 강하다"고 강조했다.

한상렬 목사, "자주는 자주로 풀어야"

▲ 방미투쟁단 단장인 한상렬 목사. 혈서로 쓴 '민족자주' 글씨가 선명하다.
ⓒ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아직도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한상렬 목사는 건강 상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괜찮다. 국민의 여망과 저력으로 금방 나았다"고 답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한 목사와 즉석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국민서명이 전달되지 않았죠. 역시 민족의 자주는 자주로 풀어야 합니다. 대동단결한 우리의 힘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아마 언론 등을 통해 서명전달 저지 소식을 접한 국민들이라면 미국의 행태를 자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미국이 얼마나 오만한지... 백악관은 이름을 검을 흑자(黑), 나쁠 악자(惡)를 써서 '흑악관'으로 바꿔야 해요"

한상렬 목사는 이번 투쟁기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워싱턴 집회에 참석한 교포 고등학생 2명을 떠올렸다.

"7시간 동안 차를 타고 왔더라구요.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니 내 혈서랑 단식 농성 얘기를 듣고 왔다고... 그날 집회가 2시간 정도 진행됐는데 그거 2시간 하려고 7시간을 온 거예요. 끝나고 다시 7시간동안 차타고 가고."

미국의 진보단체들의 따뜻한 태도 역시 한 목사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한 목사는 "미국인이지만 세계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갈구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워싱턴 정계 인사들이 각 지역구에 내려가 있어 이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또한 같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철수 주장은 이적행위'라면서 방미투쟁단에 항의하는 재미 재향군인회도 가슴아픈 일이었다.

"그 분들은 분단과 냉전의식의 소산이지요. 우리가 이제 그 인식을 청산하고 함께 화해와 통일을 열어가야 합니다. 그 분들도 우리의 슬픔을 함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미국인들과의 관계도 있을텐데 많은 교포 분들이 수고한다고 격려해주셨어요."

한 목사는 "뜨거운 환영에 감사한다"며 "우리 민족이 하나되야만 자존과 자주를 지킬 수 있다"는 당부의 말을 끝으로 기다리고 있는 지인들과 함께 공항을 떠났다.

"미국인 무관심에 새로운 각오"
방미투쟁단 대학생 참가자 이효원씨

▲ 방미투쟁단 최연소 참가자 이효원씨. 목에는 친구들이 걸어준 사탕 목걸이가 걸려있다.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이번 방미투쟁단의 최연소 참가자는 한총련 소속 대학생 이효원(22, 인하대 사회과학부 2년)씨.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방미투쟁단에 합류하게 됐다. 이씨는 선배의 제안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죠"라고 답했다. 물론 집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다.

"집에는 학교에서 미국 보내준다고 얘기하고 떠났어요. 미국에 가서 많이 알려진 뒤 집에 전화를 했는데 의외로 조심하고 오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막상 오니까 걱정돼요."

공항에는 이씨의 학교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가 마중나와 있었다. 이씨는 겁먹은 모습으로 아버지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이씨는 "몇몇 미국 시민들은 정말 따뜻하게 공감해줬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사건에 대해 너무 몰랐고 시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운이 빠질 일은 아니다. 이씨는 오히려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각오는 결연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청년학생으로서 주체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 많이 아쉬워요. 많이 고민을 못하고 투쟁단 전체 일정을 소화하는 데만 그쳤거든요. 미국내 학생들을 만나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씨는 "IAC(국제행동센터)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는데 '영어를 못해 답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더니 그 쪽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말을 몰라 미안하다'고 말했다"며 "사건을 함께 아파해 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이씨는 "미 대사관 앞까지 진입한 한국의 촛불시위 소식을 듣고 힘이 났다"며 "LA에서도 동포들과 함께 촛불시위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 권박효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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