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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 유엔회의 참석전 덩샤오핑. 이 회의 참석을 기점으로 덩샤오핑은 확실히 재기했다
1974년 4월 유엔회의 참석전 덩샤오핑. 이 회의 참석을 기점으로 덩샤오핑은 확실히 재기했다 ⓒ 중국역사망
1976년 9월 9일 새벽 1시 10분 미국 언론인 해리슨 E 솔즈베리가 '황제'라고 지칭했던 마오쩌둥이 죽었다. 그의 동지였던 저우언라이, 주더 등 혁명 1세대가 모두 같은 해에 졌다. 당나라의 여제(女帝) '측천무후'(則天武后)를 꿈꾸던 지앙칭(江靑)이 이끌던 4인방은 예젠잉(葉劍英)의 주도하에 제거됐다.

마오는 새로운 황제의 후임으로 화궈펑(華國鋒)을 낙점했다. 마오가 "당신에게 맡기면 안심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호박머리' 화궈펑은 마오가 부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열어준 '오뚝이' 덩샤오핑을 이겨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다. 또 마오에게 승계받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좋은 것은 정치적 카리즈마였고, 나쁜 것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해 번번이 실패한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화궈펑은 카리스마를 받기에는 조금 멍했고, 대신에 실패한 경제정책 등을 계승하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에게는 덩샤오핑처럼 밀어준 후원자도 적었고, 경제적인 마인드도 부족했다. 더욱이 화궈펑은 예젠잉 등 원로의 움직임 속에서 허둥지둥됐다. 마치 10.26 이후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진 정승화 참모총장을 닮았다.

반면에 '오래 업드린 자는 반드시 높게 난다'(伏久者必飛高)라는 법구경(法句經) 말씀은 덩샤오핑에게도 벗어나지 않았다. 66년부터 시작된 류사오치(劉少奇) 비판과 더불어 주자파로 낙인 되었고, 1969년 10월에는 난창(南昌)의 공장으로 유배에 가까운 하방을 당했다. 하지만 마오는 덩샤오핑이 당적을 잃는 마지막 사태까지 가지 않도록 했고, 그는 부활할 수 있었다.

난창에서 생활이 천천히 나아졌다. 덩샤오핑의 딸 덩롱(鄧榕)의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에는 이런 역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혁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던 1973년 2월 19일 덩샤오핑의 가족은 차를 갈아타고, 특별열차를 타고, 베이징에 돌아온다. 그는 서쪽 교외 화위안춘(花園村)에 머물며, 서서히 정치적 부활을 꿈꾼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의 복귀를 후원한다.

1973년 12월 12일부터 22일까지 정치국회의를 소집한 마오는 덩샤오핑을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과 중앙정치국 위원을 담당하도록 한다. 그리고 1974년 4월 저우언라이가 주최한 시아누크 왕의 환영연회에서 6년만에 얼굴을 드러낸다.

'오뚝이'의 부활 소식은 금방 소문이 났다.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저우언라이는 물론이고 마오쩌둥, 예젠잉 등은 자신의 후계로 덩샤오핑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덩샤오핑은 4인방의 거두 지앙칭과 대결을 피하지 않는 등 강한 모습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옌안시절 마오와 지앙칭. 그들은 혁명의 초발심을 잃고, 한사람은 황제가 됐고, 다른 사람은 여제를 꿈꾸었다
옌안시절 마오와 지앙칭. 그들은 혁명의 초발심을 잃고, 한사람은 황제가 됐고, 다른 사람은 여제를 꿈꾸었다 ⓒ 중국역사왕
1975년 1월 13일 제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가 소집됐다. 저우언라이는 죽어가는지 알면서도 회의의 업무보고를 했다. 저우는 지앙칭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 덩샤오핑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것 같다. 4기 전인대에서 덩샤오핑은 당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해방군 총참모장직을 맡았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부활이었다.

덩샤오핑은 75년 2월 문혁의 여파로 정체되어 있던 철도를 뚫는 것을 시작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그해 말부터 상황이 호전되면서 덩샤오핑의 인기도 올라갔다. 하지만 덩샤오핑과 상극인 4인방은 1975년 12월부터 중앙정치국 회의를 열어 덩샤오핑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에는 덩샤오핑이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이달에 4인방의 지략가 캉셩(康生)이 죽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갔다.

하지만 1976년은 중국사에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한해였다.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죽고, 주더가 죽고, 탕산(唐山) 대지진으로 40만명 가량이 죽고, 마오쩌둥도 죽었다. 이 모든 이슈가 일단 덩샤오핑에게 올지도 모르는 사상비판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불안했고, 1월에는 화궈펑을 내세우는 한편 덩샤오핑은 외무업무를 전담하는 쪽으로만 지시했다.

마오가 덩샤오핑을 약간 밀어내는 것에 고무된 4인방은 이전에 썼던 대학가 대자보를 동원해 덩샤오핑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문혁의 문제를 알고 있던 시민들은 청명절에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서 4인방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리고 1976년 4월 5일 이 군중을 대상으로 진압에 들어갔고, 첫 번째 '톈안먼사태'가 일어났다. 덩샤오핑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머잖아 다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오의 사망 후 4인방이 분쇄되고, 덩샤오핑에게 날아오던 화살들은 거두어졌다. 하지만 덩을 두려워했던 화궈펑은 마오의 재산을 계승하는 데 치중했고, 원로는 물론이고, 국민 등 모두의 마음을 잡기에 너무 약했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당 제 10기 3중전회에서 덩은 복권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趙紫陽)과 후야오방(胡耀邦)을 양팔로 해서 헤게모니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솔즈베리는 그의 책 '새로운 황제들'에서 "1978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덩샤오핑은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고, 실권을 장악했다"고 본다. 물론 그의 뒤에는 예젠잉을 비롯해 천윈(陳云) 등 원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재정의 귀재로 공산화 이후 초기 경제를 이끈 천윈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발전 중심의 이론)에 맞서 '조롱론'(鳥籠論 경제는 새와 새장과 같은 관계로 보는데, 새는 꽉쥐면 죽으므로 꽉 쥐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놔두면 날아가 새장에 가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경제식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논의다)을 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속도의 차이일 뿐 서로 상대방의 내공을 인정하고 있었다.

비극의 탄생

톈안먼 광장의 오후. 이곳으로 현대사의 격류들이 휩쓸려 갔다
톈안먼 광장의 오후. 이곳으로 현대사의 격류들이 휩쓸려 갔다 ⓒ 조창완
덩샤오핑은 실권을 장악한 후 경제정책을 최우선으로 했다. 79년 4월 중앙위원회 업무회의에부터 현 중국 발전의 초석이 된 경제특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고 시행했다(자세한 내용은 경제 '외자기업이 없으면 중국 발전도 없다'에 자세히 있음).

그해 7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 형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동시에 4개 현대화가 주로 거론됐는데, 여기에서 천윈은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등 개방의 호흡조절을 역설했다.

80년 9월 덩샤오핑의 오른팔 자오쯔양이 화궈펑을 대신해 총리에 임명되면서 덩샤오핑은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덩은 이후 다양한 외부환경속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만들기에 치중했다. 다행히 1982년과 1983년 62억, 52억 달러의 무역흑자가 났다.

하지만 1985년은 이전의 폐쇄사회와 그간 진행된 개방 사이의 문제가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조너선 스펜스는 당시에 "농업생산, 1가구1자녀정책, 공업 인센티브제와 경제특구, 지적 표현, 대미-대소관계, 당 조직과 군대의 정리와 재편, 인민저항의 합법성" 등이 초미의 관심사이자 불화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봤다.

이런 불안 속에서도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해갔다. 막후의 실세인 덩샤오핑은 1987년 11월 말 리펑(李鵬)을 임시 총리로, 당과 군대에 영향력을 가진 양상쿤(楊尙昆)을 국가주석으로 밀었다. 하지만 1988년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고 농민들은 환금작물의 재배를 위해 곡식생산이 줄어 배급제에 문제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인사가 만사인 게 정치인데, 덩샤오핑의 인사는 그다지 똑부러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예가 리펑의 무능력이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로 톈안먼에 관한 상세한 책을 쓴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 핵심'에는 리펑에 관한 농담을 소개하는데, 그 농담 속에서 리펑은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소개할 만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자 5-4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인 이 해는 그간의 개방의 속도와 갖가지 갈등이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월 15일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변화를 바라는 층에서는 이 흐름을 호기로 생각했다. 특히 후야오방은 86, 87년 학생시위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때문에 87년에는 해임됐고, 해임과정에는 자기비판서까지 제출했으니 그에 대한 동정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죽었을 때, 톈안먼 시위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낸 덩샤오핑이 권좌에 있는 만큼 한번 목소리를 내볼 심사였다. 22일 장례식날 광장의 진입을 통제했지만 광장이 군중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5월 17일에는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언론 역시 서서히 호의를 갖기 시작했다. 좀더 강한 개방주의자인 자오쯔양은 5월 19일 광장에 가서 단식농성하는 이들을 눈물을 흘릴 듯한 모습으로 말렸다. 하지만 다음날 리펑과 양상쿤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톈안먼 사태와 새로운 부상

톈안먼과 더불어 정치사의 격정이 있었던 베이징대학 미밍후.
톈안먼과 더불어 정치사의 격정이 있었던 베이징대학 미밍후. ⓒ 조창완
5월 31일 덩샤오핑은 중난하이에서 리펑과 야오이린 부총리를 호출했다. 그리고 자오즈양을 제쳐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믿었던 리펑에게 한마디 던졌다. "자네들이 장쩌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여 훌륭하게 단결할 수 있을 것을 희망하네"라고.

덩샤오핑은 톈안먼의 진압을 추인했고, 그 전면에 장쩌민이 섰다. 6월 3일 밤 늦게 군은 광장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군의 진압으로 사망한 숫자는 정부 발표가 319명(군인 포함)이고, 당시의 보도는 2000~3000명 가량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솔즈베리나 가미무라 고지 등은 현장에서 벌어진 잔악성을 그들의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76년 톈안먼에 빚진 덩샤오핑이 내린 결정 가운데 최악이었다. 더욱이 5월 30일을 전후로 대학생들이 광장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등 열기가 식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6월 24일 중국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자오쯔양이 범한 잘못에 관한 보고>를 채택하는 동시에 장쩌민을 총서기로 정식 선출했다. 톈안먼에서 물러나야할 첫 번째 대상으로 불려진 리펑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덩샤오핑은 어리석지 않았다. 대신에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중앙 정치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쩌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장쩌민은 혼자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의 오른팔인 쩡칭홍(曾慶紅)을 비롯해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동행했다. 중앙정치에는 곧바로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톈안먼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거센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덩샤오핑이 지도자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갔다. 89년 9월 4일 덩은 당 정치국에 사표를 써서 보냈다. 당시의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원로들도 사표를 받는 데 동의했다. 그렇다고 '오뚝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했다. 90년을 맞이하는 춘지에(설날)은 상하이를 방문해 푸동개발을 역설하는 주룽지를 만났다. 이 길에서 덩 샤오핑은 장쩌민과 어울리지 않는 리펑이라는 짝 대신에 주룽지로 바꿀 생각을 갖게 됐다.

덩샤오핑은 여전히 건재했다. 1992년 1월 19일 오전 9시 광둥성 선전(심천)에 덩샤오핑을 태운 기차가 도착했다.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시작이었다. 주하이(珠海)를 거쳐 상하이에서 막을 내린 이 길에서 덩 샤오핑은 지속적인 개방을 확실시 했다. 험난한 정치투쟁에서 세 번이나 살아난 덩샤오핑은 죽음앞에서는 일어설수 없었다. 1996년 2월 19일 밤 9시 파킨슨병에 의한 호흡순환기능 부전으로 사망했다.

사실 덩은 89년 톈안먼에서 사망했을 수 있다. 솔즈베리는 '새로운 황제들'의 끝을 89년 톈안먼에서 멈추었다. 스펜스도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마지막을 톈안먼에서 맺었다. 서구인들의 시각에 톈안먼은 그만큼 심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조차 이런 시각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국의 역사는 어처피 중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년의 덩샤오핑. 베이다이허에서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만년의 덩샤오핑. 베이다이허에서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중국역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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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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