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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2일 오전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사찰 도청이 관행화된 국정원이라면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2일 오전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사찰 도청이 관행화된 국정원이라면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자료의 출처는 국정원 현직 인사라고 한다. 한나라당은 더 나아가 국정원 12국 소속 연구단이 최근 `카스(CASS)'라는 휴대폰 도청장비를 개발했다며, 이 장비를 자동차에 싣고 다니며 도청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에서 도청작업을 해온 부서까지도 지목하고 나섰다.

게다가 "청와대나 민주당, 국정원이 계속 부인할 경우, 치명적인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며 "국가안위와 관련된 국기가 흔들릴 만한 큰 일이 도청돼 있지만 나라를 위해 공개를 자제하고 있음을 알라"고 주장했다. 2일에는 이회창 후보가 직접 나서서 도청의혹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도청문제를 이번 대선의 승부수로 삼는 모습이다.

@ADTOP3@
다음 국정원의 반박을 보자. 국정원은 이제는 불법 도청을 일체 하지않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도청자료라고 주장한 문건은 국정원 자료가 아니라 자신들이 모종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생산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사설공작대의 소행에 혐의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문제의 자료들이 국정원 문건인지를 규명할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와 누구한테서 언제 어떻게 입수하였는지를 조속히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한나라당이 개발했다고 주장한 `카스(CASS)'라는 휴대폰 감청장비에 대해서도 국정원에 개발계획 자체가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국정원 역시 존폐를 건 승부를 거는 모습이다.

이 쯤되면 이제 장난이 아니다. 대통령선거일을 코앞에 두고 벌어지는 이 사생결단식 대결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은 치명상을 입게 되어 있다. 한나라당의 주장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될 경우 한나라당은 이번 대선에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결과가 될 것이며, 반대로 국정원의 불법도청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타격은 김대중 정부가 지게됨은 물론 현재 대선을 치르고 있는 민주당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양측은 물러서지 않는 공방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한 쪽은 집권을 다투고 있는 공당이고, 다른 한 쪽은 이 나라의 국가정보기관이다. 그 가운데서 어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현실이 한탄스럽다. 그러나 한탄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진실을 알고 투표하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지금 그게 어렵다. 여러 정황들을 놓고 추론에 추론을 거듭해도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ADTOP4@
한나라당이 공개한 자료의 통화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당사자들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날조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청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국정원이나 민주당의 주장대로 사설공작대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는 그 대상이 너도 광범위하다.

정치권과 언론계의 수많은 인사들을 대상으로 그 정도의 대규모 도청을 하는 사설공작대를 한나라당이 거느려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밝히고 있는 국정원 도청 업무의 현황이 너무도 구체적이다. 집권을 다투고 있는 한나라당이 조작사건을 만들어 승부를 걸기에는 너무도 위험부담이 큰 모험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반면, 한나라당이 공개한 자료들의 양식과 내용은 국정원의 보고서라고 하기에는 조악한 편이다. 그보다 하급 수사기관의 정보보고서 냄새도 난다. 여의도 주변의 정보지들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의 내용과 방식이 그와 매우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국정원의 문서를 그대로 넘겨받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통화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도청을 하기는 했는데, 그 얘기를 가지고 정보성 루머와 합해 다시 누군가가 가공을 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후면 밝혀질 일을 가지고, 지금 국정원이 저렇게까지 배수의 진을 치고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양측의 주장을 들으며 여러 가지 추론을 해보게 되지만, 말 그대로 추론일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단은 검찰의 수사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선의 한복판에서 검찰이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검찰이 정치적 외압을 견뎌낼 힘이 없는 상태이고, 선거일까지의 일정을 감안할 때 대선 이전에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국정원 도청의혹은 진위여부가 가려지지 않은채 또 다시 정치공방만 오가는 속에서 선거를 치르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11월 30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거리유세에서 노무현 후보는 한나라당이 주장한 '국정원 도청' 문제를 꺼내면서 이회창 후보에게 "정모(정형근) 의원을 검찰에 가게 하라"고 공세를 폈다. ⓒ 서호영
11월 30일 부산 서면에서 열린 거리유세에서 노무현 후보는 한나라당이 주장한 '국정원 도청' 문제를 꺼내면서 이회창 후보에게 "정모(정형근) 의원을 검찰에 가게 하라"고 공세를 폈다. ⓒ 서호영

대선용 공방 중단하고 대선 이후 진상규명 바람직

본격적인 진상규명이 대선 이후에나 가능하다해도, 지금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이 문제와 관련해 보여줘야 할 태도가 있다.

먼저 한나라당에 주문하고자 한다. 대선 때까지 이 문제에 관한 정치적 공격을 중단하기 바란다. 국정원 도청의혹의 진위여부에 관계없이 지금 한나라당은 이를 대선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청자료들을 입수하고서도 한번에 이를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공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상대의 대응에 따라 공개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위협하고 있다. 대선기간 내내 도청문제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사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떳떳하지 못한 태도이다. 자신들의 말대로 국기를 뒤흔드는 일임에도 어째서 이제까지 그 내용을 보관하고 있다가 대선기간에 꺼낸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렇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주장의 진위여부가 현실적으로 선거일 이전에 판명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유권자들은 양측의 뜨거운 공방을 지켜본 상태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지못한채 투표장으로 가게될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당이 집권을 다투는 성숙한 공당이라면 도청문제를 대선의 승부수로 삼을 것이 아니라, 대선기간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그 대신 대선이 끝난 이후 국정조사, 특검제 등을 통해 철저한 진상조사에 나설 것임을 밝히는 것이 옳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건의 출처를 밝혀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정원 도청의혹 제기가 대선용이 아니라, 정말로 국기를 생각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에게도 주문해야겠다. 국정원이야 어차피 예상되는 대응이 뻔한 당사자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청와대나 민주당은 다르다. 먼저 민주당은 국정원의 도청이 없다는 예단을 가져서는 안된다. 국민들 사이에는 국정원이 어떤 형태로든 불법도청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적지않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이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자료까지 공개한 마당에, 사실확인조차 거치지않은 상태에서 국정원의 말만 믿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옳지않다.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이 이 문제를 대선에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겠지만, 도청의혹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대선이 끝난 이후에 한나라당과 함께 국정조사나 특검제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와대의 책임이다. 국정원이 불법도청을 해왔다면 그 모든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청와대이다. 설혹 청와대조차 국정원에게 속아온 상황이 되어도 말이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한나라당의 정치공세를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우선 검찰이 철저한 수사를 하도록 해야 할 것이고, 국정원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김 대통령이 나서서 이 문제를 가리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불법도청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정치공방이 대선의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치러지는 대통령선거다. 3김정치가 마감되면서 처음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이다. 그런데 선거일 이전까지 진위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워보이는 도청문제가 이같은 역사적 선거의 주쟁점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정원의 도청여부가 지금 후보들의 정책이나 비전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 하나로 모든 것을 끝낼 작정이 아니라면, 대선 이후도 생각할 줄 아는 우리 정치권의 성숙한 모습들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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