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보름 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 (외국인의 미국사회적응을 위해 정부로부터 일정한 보조를 받으며 무료영어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죠. 보통 adult school이라고 부른답니다) "말하기와 듣기" 수업을 받던 중이었지요.

그날은 선생님이 좀 특별한 제안을 하셨어요. 각자 자기가 정한 주제를 가지고 적어도 10분이상 발표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시면서, 일주일의 준비기간을 주셨어요. 순간 모두들 긴장했지요. 영어로 발표를 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신경쓰이는 일이었으니까요. 전 "한글소개와 간단한 한국말 인사표현"으로 주제를 정했답니다.

이곳에 살면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정확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 같답니다. 게다가 며칠전 한국이 아시아의 한 국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이란에서 온 분이 생각나 좋은 기회라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자료준비에 들어갔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한글에 대하여 전 제자신이 꽤 많이 알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답니다. 문제는 영어로 어떻게 말하고, 알아듣게 설명할 것인가였죠. 그런 근심만을 갖고 시작된 준비과정은 오히려 한글에 대한 무지를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가 되었답니다. 여러분에게 저의 경험이 역시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이글을 씁니다.

너무 익숙하면 어떤 것에 대한 가치의 소중함을 잊기도 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일 겁니다. 하지만, 한글은 한국사람에 의해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그 쓰임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기도 전에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사실, 진정으로 그 가치를 한국사람에 의해 인정받은 적도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근엔 "한자교육부활'과 "영어 공용화"바람마저 불고, 심각하게 고려되는 현실에서 한글은 어쩌면 한국말과 한글사용이 금지되었던 지난 식민지시대이후 가장 큰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글에 대한 인식부족"과 오랜 역사속에서 주변국가들과의 관계속에서 제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즉 "주체의식의 결여"가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한글의 역사는 다른 언어나 문자에 비해 그다지 긴 편이 아니랍니다. 15세기초,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까지 그 긴 역사속에서 우리조상들은 한국말을 사용하여 대화했지만, 따로 글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문자인 "한자"(한국사람이 부르는 중국의 문자이름)을 사용해서 모든 문서나 책을 한자로 기록해야만 했답니다.즉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한자가 정부의 "공용어"였던 것이지요.

빗나간 이야기지만, 전 발표중에 이 부분을 이야기하기가 무척 싫었답니다. 김밥이라고 말해줘도 "아!스시" 하고 고쳐 이야기하고, 한국의 문화는 모두 중국과 일본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외국인에게 문자마저 우리가 빌려써야 했다고 말하려니, 우리가 같고 있는 문화유산중에서 "한글"을 거론하지 않고 다른나라에 대해 비교우위에 있는 자랑할만한 유산을 쉽게 찾기가 힘들었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지만 세종대왕이 우리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어 세상에 당당히 내놓았음에도 한자는 고급문자라 생각한 양반들에 의해 "언문"이라 일컬어지며 천대받았으며, 한자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쓰임을 넓힐 기회도 얻지 못한채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지요. 그러다, 19세기말에 국어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글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지요. 그것도 잠시. 식민지시대에 일본에 의한 "한국어와 한글말살정책"에 희생되어야 했었습니다. 한자를 포함한 "일본어"가 공용어였던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한글이 정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그 뿌리를 확고히 내리기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해방이후에나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불행히도,1945년 9월이후 한국에서 공용문자 또는 공용어는 "영어"였다고 합니다. "조선 주민에 대한 태평양 미국 육군총사령관 포고문 제1호"에 명시된 바에 의하면 "군정기간에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 사이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 또는 부동이 발생한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의도하진 않았어도 다른 외국어,영어가 우리문화에 깊숙히 관여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지요. 우리글 "국어"와 우리말 "한글"이 비로소 공식적인 공용어요, 공용문자가 된 것은 1948 정부수립 뒤였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한글'의 많은 특성중에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은 한국사람의 문맹율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영어의 기원 로마자나 중국의 문자, 일본의 문자가 긴 역사속에서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었음에 비해 한글쓰임의 실제역사는 짧았음에도 말입니다.

무엇보다, 최근 수십년간 정보화시대에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은 톡톡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자연어를 기계어로 바꾸어 정보를 전달하는 컴퓨터사용환경에서 한글은 가장 적합한 문자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1948년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2002년 까지 불과 54년동안, 쓰임새나 쓰임어에 있어서 "한글"은 잘 다듬어져서 한국의 삶속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는 장족의 발전을 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선, 그러기엔 "한글"이 성숙해질 충분한 시간이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빠른 경제발전과 좋건 싫건 개방화로 인해 오히려 선진문화수용에 대한 열의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다, 영어에 대한 "공용화" 여론까지 드높아지다보니 한글을 잘 다듬기 위한 노력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안으로 취급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학교에서의 "한자교육부활"에 대한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자를 읽지못하는 무식한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며 개탄합니다.

물론, 한자와 영어, 지금의 한국의 삶속에서 중요합니다. 중국의 한자는 우리의 지난 긴역사 속에서 "공용어"였었습니다. 우리조상에 대해 알기위해 "한자"로 된 책을 읽지않으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모든 한국사람이 "한자"로 된 고전을 읽고 조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고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읽은후 "한글"로 제대로 번역해 낸다면 그책을 읽고 자라는 젊은 세대가 역사의식이 전같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저의 경우, 미국에서 살기위해(?) 영어를 쓰다보면 우리말속에 한자가 상당히 불편할때가 많습니다. 쉽게 "한글"로 풀어쓰면, 영어로 생각할때 훨씬 빨리 이해가 갈 한자어가 많다는 거지요.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면, 우리말속에 한자보다 "한글"의 쓰임새를 더 넓히고 쓰임어를 발굴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3000여개의 언어가 있고 그중에 100여개만이 그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다른 언어와 문자의 영향을 받지않고 백성의 문맹퇴치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문자는 "한글"뿐이랍니다. 주체적인 문자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고 그 쓰임새를 넓히는 것보다 외국어를 가지고 자꾸만 외래어를 만들어 내는 데 힘을 들인다면 "한글"의 미래는 암담해질 뿐 아니라 "한글"속에 담겨진 주체사상을 올곧이 생활속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되는 거지요. 영어를 공용화 하자는 말은 영어에 이유없이(?) 고통받는 사람에겐 현실적인 발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글"을 잘 해야지 영어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며, 한글속에 주체사상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영어 때문에 자기나라에선 똑똑한 사람이 미국에선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민족은 제가 아는 한 한국사람뿐입니다. 저희 반에 중국사람 결코 자기나라 말이 시끄러운 줄 모르고, 영어로 안되면 중국말로 이야기 해버립니다. 이란, 인도네시아, 타이완, 멕시코, 브라질, 페루에서 온 학생들도 결코 질문을 두려워하거나 대답을 꺼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 학생들 영어를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더좋은 직장을 얻기위해서 입니다. 한국사람의 영어를 배우는 이유와 다를 게 하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다릅니다. 주인정신을 잃지 않기 때문에 결코 주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유창한 영어가 아니라 주인의식입니다.

이젠, 제 발표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준비과정중에서 얻은 뜻밖의 한글에 대한 생각은 저의 발표에 정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언급했듯이, 처음엔 영어로 말을 하고 표현해 낸다는 것이 무척 근심거리였지요. 하지만, 준비를 끝내고 전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자랐음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주눅은 왜 들어? 내가 왜?" 이런 마음이랄까요. 전 "적어도 10분 이상"을 훨씬 초과하여 45분동안 발표를 했지만, 인사를 하고 내려올 때도 할 말이 더 많아 무지 아쉬워했답니다.

덧붙이는 글 | 훈민정음은 유네스코에 의해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답니다. 그리고, "세종상"을 만들어 지구촌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단체나 개인에게 수상하고 있답니다. 덧붙여, 내년 가을엔 토요일에 수업을 한다고 망설이던 "한국어학교"에 저희 두아이를 등록해야겠습니다.더 늦기전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