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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국내 대기업들은 입사지원 양식에 부모형제의 직업, 학력, 심지어 재산이나 소득까지 기재하는 가족관계 란을 두고 있다
대부분 국내 대기업들은 입사지원 양식에 부모형제의 직업, 학력, 심지어 재산이나 소득까지 기재하는 가족관계 란을 두고 있다 ⓒ 장흥배
"한 마디로 얘기하면 이렇죠. 지원자가 고아라든가, 편모 슬하라든가 기타 사회적으로 불우하다고 인식되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이를 커버할 수 있는 학벌이 있다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학점이나 학벌이 비슷한 중하위권 대학 출신 지원자가 경쟁한다면 가정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기업 인사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부서의 특성상 회사에게 불리한 사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다. 한 대기업 그룹 계열사의 인사부서에 근무했던 박경진(가명 32세)씨도 겨우 입을 열었다.

양친의 존재 여부, 부모형제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 등 소위 '가정환경'이 합격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학벌이나 성별 등의 경우처럼 통계로 산출되지 않아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취업 지원자들이 자신과 주변의 경험을 통해 느끼는 실상은 제법 심각하다.

"나를 채용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왜 부모 직업은 꼬치꼬치 캐묻는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KBS VJ특공대에 소개된 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한 여학생의 눈물어린 하소연은 우리 기업들의 채용 관행에 스며든 야만성을 고발하고 있다.

고졸 취업자의 경우 이력서와 자개 소개서만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면접자가 소위 '무난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가족사항에 대해 적정 수위를 넘어선 질문을 다반사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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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이 미치는 영향 우려할 만"

대졸 취업 희망자들은 지원자의 가족사항이 기업의 합격 여부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제법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소재 H 대학과 인천 소재 I 대학 취업 희망자 2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자의 11명인 52%가 "학벌이나 학점 등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가족사항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답했다. 별다른 영향력이 없다거나, 있더라도 크지는 않다에 답한 비율은 48% 였다. 의견이 비슷한 비율로 나뉘기는 했지만 문제의식을 가진 비율이 50%에 달해 상당수의 취업 희망자들이 가족사항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사서식에 가족관계를 기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43%가 "양식은 그대로 두되 기재 여부는 본인의 자유의사로 결정했으면 한다"고 답했고, "재산이나 직업 등을 자세히 기재하지 않으면 된다"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무조건 기재하지 않아야 한다"에 응답한 사람이 각각 26% 였다.
편모슬하 또는 고아로 자란 사실이 입사 합격여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52%가 특별히 불리하지 않다, 30%가 매우 불리하다에 답했다. 응답자의 13%는 "결정적으로 불리하다"에 답했다.
채용은 물론 해고에도 근무자의 가족 관계나 지인 관계가 작용하기도 한다. 98∼99년 사이에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한 SK에너지&세일즈(현재 SK글로벌)는 1차 희망퇴직 이후 다시 2차 희망퇴직을 받으며 전직원을 대상으로 이른바 <지인 관계 조사>를 실시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중에서 국회의원 비서관, 변호사 사무장, 행정부 사무관 이상 등 소위 '힘깨나 쓰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사들을 아는 대로 적으라는 조사였다.

1차는 벗어났지만 2차에서 결국 희망퇴직자 대상이 된 김영진(가명 32세)씨는 "인사부서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기입할 수 있는 지인이 한 사람 있었지만 왠지 치사한 느낌이 들어 결국 써내지 않았다"면서 "누구도 공개적으로 주장하진 않았지만 아무 연고도 내세우지 못한 사람들이 희망퇴직 대상의 우선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정명진(가명 34세)씨는 가족 관계를 기입하도록 되어 있는 기업들의 입사 양식에 특별한 반감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3년 넘는 직장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와 남들보다 나이가 많은 정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고아원에서 지냈다.

정씨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해서 지원하면, 내부적으로는 나이 제한을 적용하고 있는 기업이 많다"면서 "나이도 나이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족 사항을 기입해야 할 때는 무척 괴롭다"고 말했다.

가족관계 기입 자체부터 없애라

서울 소재 한 대학교 홈페이지의 취업정보센터는 '서류전형시 중요평가사항'이란 그래프 자료를 게시해 놓고 있다. 인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작성된 이 그래프는 전공, 관련 자격증 유무, 근로경력, 자기소개서, 외국어, 출신학교 등의 순으로 면접자가 평가하는 15개 항목의 중요도를 표시하고 있다. 이중 가정환경은 2.69로 4.27∼2.81의 중요도를 갖는 앞 순위 항목에서부터 13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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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 홈페이지 취업정보센터에 나와 있는 <서류전형시 중요평가항목>
한 대학 홈페이지 취업정보센터에 나와 있는 <서류전형시 중요평가항목> ⓒ 장흥배
15개나 되는 평가항목에서 중요도가 낮은 것으로 나와 있어 가정환경이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이와 다르다.

박경진씨는 "채용 규모는 줄고 지원자는 계속 늘면서 학점이나 해외연수, 어학 능력 등의 개인차가 크게 약화되는 추세"라며 "이렇게 주요 평가항목에서 개인차가 줄어들면서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조건들이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위 그래프에서 마지막 4개 항목으로 나온 성별, 가정환경, 출신학교 소재지, 출신지역 등이 합격 여부를 가름하는 캐스팅보트로 작용하는 경우가 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의 입사양식은 단지 부모형제의 이름과 나이만 적는 것이 아니다. 학력, 직업, 주민번호 등은 기본이고 심지어 재산과 소득 내용까지 기입하는 경우도 있다. 수백대 1의 경쟁이 일반적인 대기업의 공채시험에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겉치장이 아니라 '정직', '사랑' 같은 가정환경의 알맹이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기업들이 편의상 또는 어떤 목적으로든 '유복한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란' 지원자를 선호하는 것이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관행이라면 결국 가족관계를 기입하는 서식 자체를 강제적인 규제에 의해 없애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국내 소재 외국기업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 가족관계를 기입하는 란이 없다. 국민연금이나 보험 등 인사관리를 위한 주민등록등본 1통이면 족하다. 채용도 해당부서의 요구와 면접 하에 철저히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중심으로 결정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인사부의 이승은 과장은 "가족관계는 물론 생년월일, 성별도 적지 않는다"면서 "본사의 경우도 채용하려는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사과 담당자가 철저히 능력 위주로 채용한다"고 밝혔다.

한국IBM 인사부의 홍선옥 차장도 "신입사원의 경우 성적증명서를 보기 때문에 출신학교가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가족관계를 적는 란은 없고, 출신 학교를 코드화해서 점수를 매기는 일도 없다"고 밝혔다.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한 취업 희망자는 "IMF 이후 기업들은 근로자에게 구조조정이다, 연봉제다 하면서 요구할 것은 다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입사서식 하나 선진화시키지 못하는 게 참 괘씸하다"고 말했다.

국내기업도 외국기업의 인사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해상화재보험 인사과의 한 직원은 "면접자가 지원자의 학벌이나 출신지, 가족관계 등을 모르는 상태에서 면접을 치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고, 그나마 입사서식 자체에서 가족관계를 기재하지 않는 경우는 소위 취업희망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 공기업, 금융권 등을 통틀어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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