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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화면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내용과 대사는 변사(辯士)가 직접 알려주는 '무성영화'를 본 것은 1990년이었던 것 같다. 서울시청 앞에 있던 쇼핑 센터에서 마련한 특별 행사였는데, 제목은 그 유명한 '검사와 여선생'이었다. 무성영화와 변사라는 진기한 구경 거리에 관람객이 무척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동안 코미디 프로그램 같은 데서 변사의 독특한 억양과 어조 흉내를 심심치 않게 들어서일까. 솔직히 변사하면 우리나라의 낡은 흑백 필름과 변사의 말투만 떠올리곤 했지, 외국의 무성영화 시대에도 역시 변사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케말의 외할아버지 카를 호프만은 독일 작센주 림바흐시에 있는 아폴로 영화관의 변사이자 영화의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이다. 영화관 없는 세상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는 평생 예술에 마음을 두긴 했으나 이렇다 할 재능은 없어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케말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엄마와 살고 있는 데 할아버지의 영화 인생과 무언가 찾아 헤매는 발걸음에 늘 함께 하는 동반자이다. 심지어 할아버지의 스물다섯 연하 애인인 프리체 아줌마의 집에까지 동행하는 사이이다.

영화에 미쳐 있으면서 대책없는 낭만과 열정, 꿈에 사로 잡혀 있는 할아버지는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질 능력도 의사도 없기에, 할머니와 엄마는 쉬지 않고 일을 하며,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지만 또 때론 할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하며 넉넉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이제는 영화를 따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변사라는 직업도 없어질 거라는 영화관 주인의 말을 할아버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빠진 영화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봄날, 드디어 림바흐시 아폴로 영화관에도 유성영화가 도착한다.

영화만 예술이 아니고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예술이라 주장하던 할아버지. 이제는 직업도 빼앗기고 영화관 앞에 홀로 남겨진다. 극장 주인과 몸싸움을 벌인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운다. 그리고는 몸져 눕는다. 다행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할아버지는 영화 대신 정치 집회에 빠져든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해 가는 때였다.

전쟁 중에 공장 시설물 보호 요원으로 제복을 입고 일하던 할아버지는 결국 주인이 바뀐 아폴로 영화관 좌석 안내원으로 복귀하고, 비록 변사로 입을 열 수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변사의 자리에 서서 점점 쪼그라들며 늙어간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K로 시작하는 두 가지, 영화(Kino)와 예술(Kunst) 밖에는 몰랐던 할아버지. 사람은 누구나 각자 머릿속에 영화관을 하나씩 갖고 있으며 그게 바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영화관을 판타지라고 부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 날 변사가 아닌 한 사람의 관객으로 베를린의 극장에 앉았던 할아버지는 돌아와 손자에게 말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으로 보낸 내 인생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구나. 어떤 영화는 재빨리, 어떤 영화는 천천히. 눈 앞에 완전히 붙박여 있는 장면들도 있었지."

우리들 머릿속 영화관에서는 지금 어떤 영화가 상영중일까. 카를 호프만 할아버지처럼 일생 한 가지 일에 마음과 영혼이 붙들려 있었던 삶은 또 어떤 영화가 될까. 어떤 영화로 남게 될까. '가엾은 늙은이와 철없는 어린애'가 같이 걸어가며 남긴 이야기는 작가가 자신의 할아버지께 바치는 헌사가 되어 우리 앞에 남아있다.

우리들 매일의 일상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남아 언젠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면…. 그 영화는 결코 필름을 잘라버리거나 되돌려 다시 찍을 수 없기에 우리들 삶의 매순간은 또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자그마한 몸으로 70년 인생을 끌어안고 살았던 카를 호프만 할아버지는 오늘 우리에게 각자의 인생으로 멋진 영화 한 편 찍어보라고, 누구나 멋지게 찍을 수 있다고 변사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영화 이야기꾼 카를 호프만, 게르트 호프만 지음, 장혜순 옮김, 문학동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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