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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게임 노트>라는 것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이가 컴퓨터 게임에 과도하게 빠져 드는 데 대해 단속과 통제보다 스스로 자율성을 키워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누나 새날이가 중학교를 멀리 집을 떠나 다니게 되다보니 컴퓨터는 온통 새들이 차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빠가 밤늦게 귀가하는 때도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있을 때는 백발백중 컴퓨터 게임 중입니다. 시골집들이야 골목 어귀에서부터 누가 오는지 누가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앞마당을 들어 설 때까지 집안에서 기척이 없다면 빈집이거나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새들이가 "네에, 네에" 건성으로 받을 때도 역시 게임 중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내에 사는 친구가 우리 집에 왔었는데 아무도 없고 초등학교 5년생인 새들이만 혼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손님이 거실을 거쳐 다락에 올라가면서 뭐라고 얘길해 봤지만 내다보지도 않더랍니다.

다락에 있는 여러 점의 그림을 보면서 누가 그린 거냐고 물어봐도 새들이는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엄마가 그렸냐고 했더니 역시 모르겠다고 하더랍니다. 갈 때, 잘 있거라 인사를 했더니 "네에" 대답만 하고는 역시 얼굴 한번 내밀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 <나의 게임노트> 입니다. 게임을 하더라도 자신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늘 깨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나름대로 정성껏 만들어봤는데 거기에 기록되는 내용들이 가관이었습니다. 어제 내가 슬그머니 보니까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게임을 하게 된 동기'라는 난이 있는데, '그냥…' 이라고 쓰인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만했습니다만 '피로 좀 풀려고'라든가 '스트레스가 쌓여서'라고 쓰인 것을 발견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내 눈에는 새들이가 게임하면서 스트레스가 얼마나 풀리는지 모르지만 아니, 풀려야 할 스트레스가 뭔지도 웃음이 나오지만, 오히려 스트레스 쌓이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학 끝나고 개학 첫날 친구와 싸움이 붙어서 체구가 작은 새들이가 밀리면서 학교 유리창에 오른팔이 크게 다치게 된 것도 방학 때 그 친구와 게임하다가 뭔가 뒤틀렸던 것이 이유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안과 밖으로 근 40바늘을 꿰맸고 지금도 치료를 받으러 다닐 정도니 크게 다친 거지요.

'레벨을 올리려고' 게임을 하게 되었다는 이유 역시 내 걱정을 키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이 게임을 더하게 되는 동기가 된다니 제 기대하고는 한참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라는 항목에는 '시물레이션 게임 지도만 보았다'라든가 '계략을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 '기억이 안 난다' 등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넋을 놓고 망연자실해야 했던 대목은 '게임을 하고 나서 기분이 어땠는가'라는 항목이었습니다. '저장을 많이 해서 흐뭇했다'고 합니다. '레벨이 많이 올라서 좋았다'고 적혀 있는 게 제일 많았습니다. '새로운 계략을 알아냈다. 기분 왔담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게임 후에 남는 게 없었다든가 아니면 숙제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허겁지겁했다든가, 허탈하다든가, 폭력적이어서 찜찜했다든가, 눈이 아프다든가. 이 좋은 소감들을 다 놔두고 '흐뭇하다'니. 그까짓 레벨이 올랐다고 기고만장하다니….

게임을 한 시간을 적는 난도 나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세 번이나 한 날도 있고 도합 4시간이 넘는 날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무려 2시간 반이나 게임을 하고서는 오래 해서 흐뭇하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냉가슴만 끙끙 앓고 있습니다. <나의 게임노트>를 표로 멋지게 만들어서 파일에다 묶어 주기까지 하면서 했던 다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만 꼬박꼬박 소상하게 하면 된다고. 그러면 암 말도 안할테니 네 마음대로 컴퓨터를 하라며 발부한 면허장 때문입니다.

부자간의 이 지독한 동문서답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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