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한민국 국회는 7월 31일 본회의에서 장상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한 표결을 실시해, 찬성 100표, 반대 142표로 장 총리 인준을 거부했다. 국회에서 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헌정사상 일곱번째이며, 1960년 8월 김도연 총리 인준안이 부결된 이후로 42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날 우리 집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처리로 말미암은 일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며 각기 가정을 이룬 삼형제 중의 맏이로서 어느 정도 '권위'를 지니고 있는 내가 가족들한테서 처음으로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 받은 일이다.

그날은 전반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즐거운 날이었다. 일터로 출근한 동생을 제외하고 동생 가족과 두 명의 생질 아이들도 함께한 또 한번의 가족 나들이가 있었다. 천수만 제방 길과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보령시 성주산의 화장(花藏)계곡에 가서 하루종일 피서를 즐겼던 것이다.

1시간 15분 정도로 단축된 길을 타고 집에 돌아온 시각은 오후 7시경. 국회 일이 몹시 궁금하였지만 가족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라디오도 켜지 않고 달려온 터라서 집에 도착한 즉시 서둘러 텔레비전을 켰다. 놀랍다면 놀라운 사건이 톱 뉴스로 보도되고 있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샤워를 한 다음 동생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데, 화제는 자연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처리에 관한 얘기였다. 팔순이 다 되신 어머니는 아직 '여성의 적은 여성'인 범주 안에 머물 수 있는 관점으로 부결을 잘된 일로 보셨고, 여성 총리의 출현을 기대했던 아내와 제수씨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사십대 중반인 동생은 장상씨에게 적용된 도덕성의 잣대를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회창씨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흥분했다. 동생의 이런 논법에는 올해 중3인 내 딸아이가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나는 장상씨에 대한 청문회가 진행되던 때부터 국회의 부결 처리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청문회에서 아무리 장상씨의 '부적격'이 논증되고 어쩌고 하더라도, 이회창씨가 안고 있는 동질의, 또는 그 이상의 문제와 관련하여 '정략적 타협'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되면서도, 한나라당에 덮씌워져 있는 일종의 '관성 법칙'의 작용으로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예상이었던 것이다.

야당이면서도 원내 제1정당인 한나라당에 덮씌워져 있는 '관성 법칙'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겠다.

아무튼 그날 우리 집에서 '청문회'가 열린 것은, 원인이야 장상씨에 대한 국회 청문회와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부결 처리에 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내 '입방정' 탓이었다. 저녁 식사 후 모두 거실에 둘러앉아 수박을 먹던 때였다. 한잔 술로 거나해진 내가 가족들에게 청문회를 자청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국회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헐 만헌 인물이 읎어. 청문회라는 것이 이제서야 생겨난 것두 하나의 원인이겄지먼, 하여튼 그런 실정이여. 나라의 중책을 맡을 만헌 인물들 중에서 온전히 깨끗헌 사람이 아주 즉거나 거의 읎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여. 생각허면 슬픈 현실이지. 그래서 허는 말인디, 금명간에 청와대에서 나헌티루 중요헌 전화가 올 지두 물러."

그러자 맨 먼저 호기심의 눈빛을 반짝이며 반응을 보인 쪽은 딸아이였다.

"청와대에서, 왜요?"
"응, 김대중 대통령이 아빠보구 국무총리를 좀 맡어달라구 헐 지두 물른다는 얘기지."

그러자 어린 조카 녀석들을 제외한 가족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이 한마디했다.

"피, 아빠가 별루 유명헌 소설가두 아닌디, 청와대에서 무슨 그런 전화가 온대요?"
"유명헌 소설가는 아니어두, 아빠가 깨긋헌 선비니께…. 옛날이나 지금이나 진짜루 유능헌 인물은 초야에 묻혀 있는 벱이여. 아냐?"

그리고 나는 짐짓 정색을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아무튼 아빠가 하루아침에 국무총리가 될 지두 물르니께, 지명을 받으면 국회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헐 수 있을라나, 우리 집에서 우리 가족끼리 미리 한번 청문회를 해보자. 워띠어, 재밋겄지?"

그러자 아내가 깔깔 웃으며 찬동을 하고 나섰고 제수씨도 거들었다. 어머니도 찬성을 해서 곧 청문회를 열기로 하고 우선 역할 분담을 했다. 동생과 조카들은 방청객, 어머니는 증인, 나머지 가족은 질문자의 역할을 맡기로 했다.

우리는 청문회의 진지한 분위기를 위해 텔레비전을 끄고, 우선 '저녁기도'를 했다. 통상적인 저녁기도 후에 내가 간단히 우리 가족의 청문회를 잘 보살펴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는 '화살기도'를 했다.

드디어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가족 청문회가 국회 청문회와 다른 점은 웃음이 많다는 것…. 웃음 속에 약간의 비애 같은 것이 있고, 비애 속에서도 웃음이 있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웃음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 가족 청문회의 모습을 중계 방송하듯 세세히 그려낼 수는 없다. 미구에 일약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될지도 모르는 나와 가족 사이에 벌어진 청문회의 주요 쟁점들과 결론 사항들만을 간추려서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 부동산 투기 문제

오십대 중반의 세월에 이르도록 부동산 투기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현재까지 단 한 평의 땅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건 무욕의 경지이기보다는 무능의 극치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전무하다면 스스로 가져보고자 하는 욕구가 필요 가능한 것 아닌가. 부동산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았다는 건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고, 가장으로서의 무책임이다.

2) 위장 전입 문제

본인은 위장 전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몇 년 전에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주민등록을 한동안 친척집으로 옮겨놓은 적이 있다. 남의 사업에 이름을 잘못 빌려주어 큰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파생한 일이지만, 이것은 명백히 부도덕한 일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증 빚과 세금 문제가 아내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저지른 일이므로, 법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법률 지식이 빈약하고 배짱도 없는 심성으로는 도저히 국무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다.

3) 주택 문제

고작 23평 짜리 연립주택 한 채를 소유하고, 작은 집 안에 수많은 책을 소장함으로써 다섯 가족의 주거 생활에 큰 불편을 끼치고 있는 것은 실로 옳은 처사가 아니다. 좁은 공간을 좀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책을 과감히 처분해야 하는데, 할머니의 타박을 감수하면서도 책 소장을 고수하는 것은 독단이고 독선이다. 그리고 다섯 가족이 살고 있는 유일한 부동산인 집을 남의 사업에 담보 제공을 했다가 법원 경매 지경에서 간신히 되찾은 눈물겨운 사연은 가장으로서의 무능과 무책임을 노정한 일이다. 아무튼 108평 짜리 아파트 3채에다가 육신을 펴 늘인 사람, 아파트 두 채를 하나로 만들어서 94평의 공간에 팔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는 해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비난할 수 있는 자격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4) 병역문제

자신의 현역 복무는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베트남 전쟁에 지원을 한 파월 경력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이 사십에 결혼을 하여 오십대 중반에 이르도록 아들을 군에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병역의무를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훗날 공군에 입대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자식의 병역 문제는 대체로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다.

5) 가족의 국적 문제

미국에 가서, 미국 병원에서 아이를 낳기만 하면 그 아이는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이 되는 이 편리한 시대에, 수많은 부유층 사람들이 태어날 자식에게 미국 시민권을 선물할 요량으로 원정 출산을 하고 있는 이 선택받은 시대에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 혈육을 두고도 그런 것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은 너무도 꿈이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이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온 국민이 영어에 미쳐 돌아가는 풍조를 개탄하는 것은 그야말로 수구 꼴통의 모습이 아닌가.

6) 기타 사항

유명 작가는 아닐 망정 고료 수입이 전혀 없지는 않았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살면서도 통장에 확보하고 있는 돈이 이제 겨우 2천만 원이라면 생활인으로서 너무 무능한 것 아닌가. 작가라는 명패를 얻은 지 20년이 지나도록 히트작 하나 내지 못했다는 것은 작가로서도 너무 무능한 것 아닌가.

※결론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지금까지 청렴 결백하게 살아온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 진실과 옳음에 대한 추구와 확신, 사회공동선에 대한 소망과 헌신, 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 그외 인간으로서의 품성과 관련하는 면으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자식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신세계만큼은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현실적인 무능을 반증한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너무 무능하다. 그리고 가진 것이 너무 없다. 그러므로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적합하다.

결론을 다시 한번 적자면 나는 국무총리가 될 수 없고, 국무총리직을 고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가족 청문회의 결론을 도저히 부인도 거부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쉽게 마음을 굳혔고, 마침내 가족들 앞에서 중대 결심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내일 아침에 우리 집 앞에 까치가 와서 울더라도, 국무총리직을 안 받을 껴. 청와대에서 전화가 오면 정중허면서도 단호허게 사절을 헐 껴. 흐흐흐."

내 현실적인 무능의 실체들이 그야말로 남김없이 까발려지고 난도질당한 이 판국에서도 나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과 존경, 신뢰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임을 나는 확신할 수 있기에, 고사하기로 결심한 국무총리직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는 아무런 상처도 후회도 없는 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까치가 와서 울 턱이 없고, 그것이 천부당만부당한 일임을 잘 아는 가운데서도,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또 한바탕 즐겁게 웃으며 시원하게 수박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의 웃음이 서민의 건강한 웃음임을 느끼고 믿으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