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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許亨植)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여름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다. 우리 항일유적지 답사단 일행을 안내한 흑룡강성 조선족역사학회 서명훈 이사는 거기에 모셔진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 등 34분이 조선족이라고 했다.

"허형식 장군은 구미 임은동 출신이에요. 임은동은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과는 철길 사이지요."
"네?!"

동향 출신이 한사람은 친일로, 한사람은 항일로

동행한 임정 국무령 이상룡 선생 증손 항증씨가 나에게 말했다. 항증씨는 외가가 임은동 허씨 집안이라서 그 마을 내력과 지리에 밝았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라고 했거늘 먼 이역에서 고향 어른을 만나다니.

마침 연길 서점에서 산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결전》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김우종씨가 쓴〈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편에서는 허 장군의 최후도 읽을 수 있었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경위원(경호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 목란, 등흥 등지에 소부대사업 검열을 나갔다. 장서린 소부대가 동흥현 두도하자, 이도하자, 삼도하자의 숯구이 노동자들 속에서 반일회원을 100여명이나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듣고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비밀공작을 더 잘하라고 지시하고는 장서린이 파견한 왕조경과 함께 8월 2일 귀로에 올랐다.

바로 이때 일제 토벌대가 이 지역에 출동하여 산간지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허형식 일행은 청송령 기슭에서 밤을 보내고 8월 3일 아침, 경위원은 그런 낌새를 모르고 밥을 지고자 불을 지폈다. 계곡이 깊어 밥짓는 연기가 미처 흩어지지 않아 그만 토벌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허형식은 두 전사와 함께 토벌대와 싸웠다.

하지만 세 사람으로 몇 배나 많은 토벌대의 포위를 뚫고 나가기는 어려웠다. 허형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엄호할 테니 빨리 철퇴하라고 두 경위원에게 명령했으나 누구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진운상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허형식은 왕조경에게 문건 배낭을 넘겨주면서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퇴각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왕조경은 할 수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허형식은 피를 흘리면서도 왕조경을 엄호하기 위해 큰 나무둥치에 기대어 적들을 계속 쏴 눕혔다. 그러나 적들의 기관총 사격에 허형식은 끝내 장렬히 쓰러졌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귀국 후 대학 도서관에서《한국독립운동사 연구》제7집에서〈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장세윤씨의 논문이 눈에 번쩍 띄어 단숨에 읽고서는 잦아진 허형식 장군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일었다.

생가는 폐허되고, 유족들은 흩어지고…

수소문 끝에 성균관대학 장세윤 교수를 만났다. 장 교수가 허형식 장군을 높이 평가한 점은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로서 1941∼2년 무렵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허 장군은 끝까지 만주를 지키다가 토벌군에게 장렬히 전사한 분으로 독립전사의 열정과 순수성은 그 누구보다 앞선 지도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908년, 왕산 허위 의병장은 일본 통감부를 깨뜨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였다가 폐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이 옥사로 임은동 허씨들은 일제 순사와 밀정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1915년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나는 장세윤 교수와 함께 허형식 장군의 임은동 생가를 탐방하였다. 하지만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홀로 고향을 지키는 허호씨는 망명간 임은 허씨 유족들은 그 새 러시아·중국·북한·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2000년 여름, 나는 다시 하얼빈을 찾았다. 조선문화궁전에서 김우종 서명훈 선생을 만나 허 장군의 생전 활약상을 자세히 들었다. 이튿날, 조선족 기사를 통역 삼아서 허 장군이 순국한 희생지를 찾아 나섰다.

중국서는 '항일영웅' 평가받는 허형식 장군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을 받아들고 중국공산당 수화시위원회를 방문하자, 당사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다. 1998년 10월 20일 청송령 들머리에 허형식 희생 기념탑을 세웠는데, 내가 남조선에서 온 첫 참배객이라고 환대가 대단했다. 비서장, 당사연구실장, 공보관이 길 안내를 자청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경안현에 들리자 당사부국장, 주임도 동행했다. 대라진인민정부에 들르자, 부서기가 길 안내를 맡아 마침내 청송령 들머리 허형식 희생지 비석에 이르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허형식 장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제일 가는 영웅이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 일행은 들꽃을 꺾어 비석에 헌화한 후 깊이 엎드렸다. 마침 이웃 풍림촌에 허 장군을 아는 노인이 있다고 하기에 찾았다. 내가 가져간 사진을 보이자 손환무(81세) 노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곧 "허 장군"이라고 소리쳤다. 자기 집은 산밑 외딴집이었는데, 이따금 한밤중에 허 장군 일행이 무장한 채 찾아와서는 불부터 끄게 하고 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던 바, 자기 어머니가 캄캄한 부엌에서 밥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허 장군은 기골이 장대한 풍채로 늘 실탄과 비상 식량을 두 어깨에다 엑스 자로 메고 다녔다고 회고했다. 허 장군이 희생된 후, 마을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머리는 일제 토벌대가 잘라가고 나머지 시신은 산짐승들이 다 뜯어먹고 뼛조각 몇 개만 남아 있더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비참한 최후맞은 허형식 장군

그 새 땅거미가 졌다. 돌아오는 길이 바빴지만 당사 관계자들은 귀한 손님이라고 놓아주지 않고 만찬을 베풀었다. 그네들은 곧 경안현에다 공원을 만드는데 그 이름을 '형식공원'으로 명명한다면서, 이참에 허 장군 고향과 경안현이 자매 결연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나는 그 호의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연구해 보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는 우리나라 실정을 너무 모른다고 실소했다. 허 장군 생가는 폐허가 되고, 구미 시내 지나가는 사람에게 '박정희'를 물으면 다 알겠지만, '허형식'을 아느냐고 물으면 단 한 사람이나 나올 지 의문인 현실을 너무 몰랐다.

그들은 여러 차례 술잔을 치켜올리면서 "허형식 장군 만세!"를 소리쳤다. 그러면서 자기네가 해방된 것도 허 장군 덕분이라고 잔뜩 추켜세웠다. 영웅은 갔지만, 그를 기리는 마음은 아직도 만주 벌판에는 살아 있었다.

허형식 장군이 끝까지 소부대 활동을 하면서 만주를 지킨 것은 더 이상 일제에 밀려 물러날 수 없다는 그분의 자존과, 또 다른 외세에 빌붙으면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은 그만큼 더 멀어진다는 깊은 헤아림 때문이었으리라.

동북항일연군 제3군 군장과 제3로군 총참모장까지 담임한 바 있는 허극(허형식의 異名)의 위용에 대하여서는 어떤 사람도 시비가 없다. 비록 그가 가담해서 싸웠던 동북항일연군이 중공당 조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상은 공산주의 혁명보다 자기 조국의 독립이었고, 일본군의 패망과 함께 자기의 조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떳떳하게 동북항일연군의 역사에서 빛나는 한 장을 차지하고 있으며, 참으로 의병장의 후예답게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한인들 속에서 제일 가는 기수로써, 별로써 빛을 뿌리고 있다.
- 연변 작가 유순호의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제일 가는 별》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독립기념간' 7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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