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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합동조사반은 6월 19일 오후 7시 미2사단 사령부에서 지난 13일 발생한 미군 궤도차량 여중생 사망사고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번 사고는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라고 말했다. 이번 발표에는 유가족들과 미군측으로부터 선별적으로 연락을 받은 시민사회단체 대표, 일부 언론사가 참여했다.

미군측은 지난 현장 브리핑이 매우 성의없이 진행된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을 생각해서인지, 작전 지도 및 작전 차량 사진, 정확한 수치까지 기재한 사고 현장 약도 등을 준비해오는 등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훈련 내용 및 사고 정황

미군측은 당시 훈련 내용에 대해 ▲당시 훈련은 전술 평가를 위한 것으로, 경기도 양주군 무건리 훈련지역에서 한국군 부대와 연합훈련을 실시중이었다 ▲1개 부대가 북에서 남으로 공격을 실시하고, 다른 1개 부대는 남에서 북으로 방어하는 훈련이었다 ▲사고 당시 경기도 양주군 56번 국도상에는 2개의 부대가 이동하고 있었다 ▲사고차량이 속한 부대는 총 7대의 차량으로 구성된 공병대대로 사고 당시 커브길을 돌아 약간 경사진 직선도로를 가고 있었다 ▲사고차량은 차량 행렬중 호송용 짚차, 장갑차에 이어 세 번째 열에 있었다 ▲맞은편에 브래들리 장갑차 5대로 구성된 대대가 마주오는 가운데 사고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고 정황에 대해서는 ▲사고 당시 차량은 시속 8-16 킬로미터의 속도로 커브길에서 약간 경사진 직진도로로 운행중이었는데, 중앙선은 넘지 않고 편도 1차선을 갓길까지 전부 차지한 채 직진 운행중이었다 ▲그런데 차량 구조상 운전병의 시야가 제한되어 있고, 특히 길 오른편은 바라볼 수 없어 학생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커브길을 막 돌았을 때 관제장교가 학생들을 발견했고, 그때 차량과의 거리는 약 30m였다. 관제장교는 곧바로 운전병에게 멈추라고 무전 교신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두 번째도 실패였다. 결국 차량 인터폰으로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고 운전병이 그제서야 곧바로 차량을 정지시켰으나 차량 중량과 속도로 인해 바로 멈추지 못하고 진행해 학생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이 약 8초다.

▲마주오던 브래들리 장갑차는 사고 차량과 교행하지 않고 사고 이후 맞은편 1미터 떨어진 지점에 멈춰섰다 ▲브래들리 장갑차의 지휘관은 사고 직후 차량에서 하차해 상황을 파악하고, 피해 학생들이 여전히 장갑차량 바퀴 밑에 깔린 것을 발견, 사고 운전병에게 후진할 것을 명령했다 ▲사고 운전병과 관제 장교 모두 알코올, 마약 중독검사 결과 음성으로 판명되었다고 에이크 미2사단 헌병 사령관이 발표했다.

미군 지휘 체계 책임 인정

그동안 유족들은 사고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한 채 진행하다 맞은편에서 장갑차가 오니까 사람 목숨 귀한 줄은 모르고 장갑차 망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갑자기 오른편 갓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며 사실상 고의적 살인행위임을 주장해 왔다.

또한 차체가 도로폭보다 넓은 궤도차량이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한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인 만큼 운전자 개인 과실이 아닌 작전상 지휘체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입장이었다. 더불어 미2사단장급 이상의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강조해 왔다. 이번 합동조사 결과는 이러한 유가족들의 주장을 많이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무엇보다 미군측은 이번 사고의 책임에 대해 궤도차량이 좁은 도로에서 무리하게 교행하게 지시한 것은 지휘관의 실수며, 지휘 체계상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도로에 사고 방지턱을 설치하고, 경고 표지판 설치, 도로 확장과 인도 설치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좁은 도로에서 궤도차량의 교행도 최소화하도록 하겠다는 등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전에 비하면 상당히 진전된 것이나 유족들은 이번 결과 발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

우선, 아직까지도 사고 조사 내용에 의혹이 풀리지 않는 지점이 많다.

▲운전병이 학생들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무전 교신이 두 차례나 실패해 제 때에 경고를 듣지 못해 사고가 났다는데 통상적인 군사훈련에서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지. 유족들은 말 그대로 차량 자체가 시야가 제한적인데다 무전 교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움직이는 흉기나 다름없지 않냐며 반문하고 있다

▲한미합동조사와 유족들 주장 가운데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고차량이 맞은편에 오던 장갑차를 피하기 위해 오른쪽 갓길쪽으로 갑자기 우회한 사실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에 관해 한미합동조사에서는 '사고차량은 갑자기 우회하는 일 없이 직진 운행중에 사고가 났고, 마주오던 장갑차가 있긴 하나 서로 교행하지 않고 사고 차량과 1미터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갓길 포함 편도 1차선을 꽉 채울 정도의 사고 차량이 중앙선을 넘지 않고 직진 운행중이었다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부터가 의문이다. 사고 지점 인근 갓길에 아스콘이 깨져나간 부분이나 갓길 옆 풀숲이 바퀴에 눌린 흔적은 사고 차량이 갓길 넘어서까지 오른쪽으로 궤도를 급하게 틀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미 합동조사에서는 궤도차량의 무게가 아스콘이 깨져나갈 정도인데, 만일 풀 위를 지나갔다면 그 정도 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을 거라며 유족들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당시 학생들은 갓길을 앞뒤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차량의 주행속도가 8-16킬로미터의 느린 속도였고, 처음 학생들을 발견한 지점이 30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라면 충분히 사고를 막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 충돌하더라도 충격정도가 덜하거나 적어도 더 맨 앞에 가던 학생은 피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두 명이 갓길에 나란히 앞뒤로 위 아래 연이어 누워 있는 상태로 전신을 밟고 지나갈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한미 합동조사 결과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 사고 방지를 위해서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고, 사전 대비책이 필요한데 미군측은 이번 사고에 대해 지휘 체계의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 처벌엔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처벌 수준도 가족들의 기대와는 어긋난다.

질의응답 시간에 미군측 대표로 나온 맥도널드 미 2사단 참모장은 사고 운전자 등 관련자에 대해 이번 사고와 관련 어떤 조치를 취한 게 있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그리고 사전 대비책 중 하나로 훈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여부에 대해 묻자 통상적으로 훈련 진행상황을 마을 이장 등에게 사전에 통지한다고 했다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이장 박용안씨가 그런 통보를 받은 적이 없다며 반박하자 바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반드시 사전에 통보할 것을 약속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고의'와 '우발'사이

오후 8시 30분경 여러 의혹과 질문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미군측은 일방적으로 마지막 질문만을 받겠다며 이날의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미 2사단 민차참모 오노 소령이 미2사단장을 대신해 공식적인 사과문이라며 두 분 아버님께 편지봉투를 건넸다. 그러나 이 편지엔 "깊은 애도를 표한다" "조의를 표한다"는 정도의 말뿐이어서 오히려 유족들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

정말 유족들이 바라는 건 형식적인 사과문 한 장이 아니다.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일. 그리고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받는 것. 이것이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저녁 늦게 한미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면서 행사 예정 바로 몇 시간 전에야 연락하고, 그것도 언론이며 시민단체를 선별적으로 연락해 들어오게 하는 식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군측에서 무엇을 하던간에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덮어둔 채 구색맞추기 식의 사건 조사와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군당국은 이번 사고가 절대 고의가 아닌 우발적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어떤 범행을 저질러야겠다고 직접 의도할 때만이 범행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음에도 그를 게을리하거나 명백한 범죄행위를 보고도 침묵하는 행위 등도 범죄행위에 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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