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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는 파멸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여자가 스스로 파멸을 선택해서 무너져 내리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전의 '이비사'나 '쿄코(무용수 교코 이야기가 아닌, 다른 소설이다)'와 닿는 부분이 있다. 더욱이 그 파멸이 스스로 선택한 '자멸'이라는 점에서 오는 섬뜩함도 그 이전 소설들의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

대신 무라카미 류는 '쿠바'라는 매개체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나간다. 쿠바는 생명이 꿈틀대는 곳이다. 미국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이며, 공산주의의 마지막 보류이며, 혁명으로 자립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상황과도 매치된다.

무라카미 류가 자주 얘기하듯, 일본을 떠난 사람들은 일본에서 철저히 무시당하지만, 사실 그들은 전체주의 횡행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한, 진정한 '개체'로서의 인격체들이다.

결국, 남에게 이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던 남에게 자극받아야만 어떤 행동이건 수행해온 레이꼬가 '나'에게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레이꼬가 찾아온 곳은 미국이 아닌 '쿠바'가 아닌가 말이다.

무라카미 류는 쿠바의 샤머니즘까지 동원하여 여성의 파멸과 주체 상실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고백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자의 정신적 공황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극도로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샤먼이 던지는 이야기는 상황 전체를 결코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필자의 의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레이꼬는 스스로 파멸하려 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열지 않기 위해서. 독립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사이에서의 괴리, 일본이라는 사회 속에서 SM이 갖는 인간관계적 의미를 드러내는 무라카미 류가 던지는 결말은 섬뜩하고 의미심장하다.

샤먼의 진단에도 레이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늘 그래 왔듯이 스스로가 선택한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파멸은 그녀가 그녀 인생에서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한 행동이었으며 파멸하는 순간 그녀는 '독립적 자아'로서 난생 처음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비사의 여주인공이 사지를 절단하고 나이트클럽 마스코트가 된 순간 비로소 개체가 된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단, 이런 아쉬움은 떨치기 힘들다. 과거 코인 로커 베이비스나 69를 통해 환상적인 스토리 텔링 역량을 보이던 류의 힘이 다소 소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쿠바라는 매력적인 공간과, 류 특유의 강압적 말투, 물흐르듯 거침없는 필치와 디테일한 묘사는 여전하지만, 초-중기 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던 '이야기 스스로 말하게 하기'가 작위적 문학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은 쉽게 떨쳐지지가 않는다.

타나토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장정일 해설, 이상북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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