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고추를 심었다.
예년처럼 그렇게 나는 고추를 심었다. 비 온 뒤 어느 흐린 날을 택하였고 비싸지만 유기농 고추모를 사 왔다. 올해도 역시 비닐은 치지 않았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고추를 지지대에 묶지 않고 그냥 심었다. 일이야 번거롭지만 고추가 스스로 착근에 성공하는 한달 쯤 뒤에 묶어 줄 것이다. 다른 집처럼 두둑을 미리 만들지 않고 즉석에서 두둑을 치면서 동시에 풀을 매는 효과를 겨냥한 것도 예년과 같았다.

예년처럼.... 예년과 다르게...

땅을 깊게 파지 않으려고 괭이를 두고 쇠 갈쿠리로 두둑을 걷어 올렸다. 갈쿠리따라 예년과 다른것들이 딸려 올라왔다.

갈쿠리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지렁이가 수도 없이 나뒹군다. 아, 고추 심는 내 곁에서 재잘대며 고추모를 나르던 우리 새날이가 없는 것만이 예년과 다른 게 아니었구나. 땅개가 굼벵이를 남겨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질을 치는 것도, 눈에 띄게 땅이 부드러워진 것도, 그래서 잡초가 어시지 않고 힘없이 잘도 뽑혀나는 것도 예년과 다른 모습이다. 벌써 감자밭에는 많은 무당벌레가 꽉 들어 차 있다. 잔칫집 손님들처럼 북적댄다..

현란한 색깔의 무당벌레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먼데서 오시는 손님 마냥 반가워진 것은 생명귀농학교 교육을 통해서다. 무당벌레는 배추나 딸기 감자 등의 줄기에 치명적인 진딧물을 잡아먹고 사는 익충이다. 번식률도 좋아 한번에 20-30개의 알을 한해에도 몇 차례나 낳고 그 알은 보름 안에 성충이 된다. 영어 이름처럼 아가씨벌레(ladybug)라서 그럴까? 무당벌레는 어찌나 깔끔을 떠는지 농약을 한번이라도 준 밭에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무당벌레와 지렁이가 반갑다

올해는 고추모를 200포기 줄여 300포기만 심는다. 포기는 줄여도 수확은 작년 이상으로 할 무슨 비책이 있어서가 아니다. 선걸음으로 진안까지 다녀 온 농민회 회원의 유기농 고추모가 유별나서만도 아니다. 매년 달라지는 땅, 되살아나는 우리 땅이 무언의 언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부산물을 거둬들이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밭에다 두어 썩히고 특히 제초제를 전혀 안 쓸 뿐더러 풀을 매는 대신 낫으로 일일이 베어 깔아 주는 작업을 몇 년간 하다보니 수확이 확실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장갑까지 벗어 던지고 맨발로 작업을 하다보면 '처녀 젖가슴'이라 노래한 시인의 싯구가 절로 실감난다. 생명농업의 핵심은 땅을 살려 내는 것이라는 귀농학교 선생님의 강조가 새삼 가슴을 파고든다.

토지의 박경리 선생은 일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 산신께 제사 지내는 것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땅에서 비닐을 걷어 내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 비닐은 '철없는 식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무모한 시도다. 철없이 먹는 식품은 철없는 사람을 만들 것이라는 내 생각에 변함이 없다. 어머니 대지를 질식시키고 태어난 대지의 산물이 누구의 생명을 북돋우겠는가 말이다.

인디언 추장 시애틀의 유명한 경고가 있다. '대지에서 일어난 일은 대지의 자식에게도 일어난다'는.

시골집 마당까지도 죽음의 회색 시멘트가 뒤덮여 있고 산골짜기 밭은 비닐로 숨통이 막혀 있다.

청년이 살아야 조국이 산다? 땅이 먼저 살아야...

땅이 죽으면 그 위에 어떤 생명도 살 수가 없다. 이제 재앙은 전쟁과 천재지변만이 아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광범위하게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땅의 황폐화다. 땅위의 식물과 동물, 그리고 물과 공기가 모두 인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모두 땅의 자식이요 한 형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사람의 육신이 땅에서 왔다는 것도 망각하고 지낸다. 자식 중 어머니 대지에 패악을 저지르는 가장 못된 패륜아가 인간인지도 모른다.

땡볕아래서 풀을 메다보면 제초제에 대한 유혹이 없을 수가 없다. 특히 요즘 나오는 제초제는 깨알같은 분말로 나오기 때문에 액체 분무방식보다 농약중독 위험도 적다. 2천원 주고 두 봉지만 사면 1천여 평 땅에 잡초는 흔적도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귀농학교 본부장님이 우리에게 '노동은 곧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한 여름 내내 무더위 속에서지만 대지의 신에게 웅크리고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이쿠.... 지렁이가 내 괭이에 맞아 두 동강이가 났다.
순간적으로 괭이를 놓고 지렁이를 살폈다. 흙으로 묻어 주었다. 흙 속에 묻어 주면 잘린 지렁이도 살아나는 법이다. 지렁이 한 마리가 1년 동안 800킬로그램의 거름을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렁이 몸뚱아리는 그냥 흙이 통과하는 통이다. 흙이 지렁이 몸통을 통과하면서 좋은 무기물로 변한다. 7년 동안 생활부산물 이외에 일부러 거름을 우리 밭에 준 적이 없지만 해마다 풍년이 드는 것은 이 지렁이 공로가 크다.

괭이를 잘못 놀려 지렁이를 잘라버려도 지렁이는 죽지 않고 산다. 잘린 양쪽이 각각 앞 뒤 부분을 만들어 내어 두 마리로 변한다. 무서운 생명력이다. 하지만 표피는 어찌나 부드럽고 연약한지 한동안 햇볕에 노출되어 자외선을 쬐기만 해도 죽어버린다.

어릴 때 할아버지들이 자지 삐뚤어진다고 지렁이한테 오줌싸지 말라는 꾸지람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농사의 일등공신인 지렁이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줌 속의 요소가 지렁이의 피부를 녹여내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솥에서 막 나온 뜨거운 물 한 바가지도 그냥 마당에 안 버리고 식혀서 버렸던 선조들의 생명사랑이다.

고리로 연결되어 있어야 참 생명

비타민A의 보물창고라는 고추. 비타민C는 귤의 두 배, 사과의 50 배가되는 고추. 고추도 고추 나름일 것이다. 가을 고추걷이 할 때도 일반 고추와 많은 차이가 난다. 다른 집 고추들은 따자마자 읍내로 가져가서 건조기에 말려야 한다. 적어도 보름 이상을 말려야 하는데 날이라도 궂으면 금세 물크러진다. 우리 고추만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태양초가 가능하다. 물크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농약 한 번 안 치지만 작년처럼 올해에도 탄저병이 우리 밭에는 기습을 하지 못 할거라 격려하며 고추모를 심는다.

근 열흘째 먼 지방 공사판에 일 나갔던 윗집 임 씨 아저씨가 걸음을 멈추고 '어이 전씨이~' 하면서 말을 건다.
"올해도 고추농사 일등 할거여? 올해는 심는 것도 일등이네 그려."
그렇구나. 예년과 가장 크게 다른 것이로구나. 매년 다른 집들보다 파종이 반걸음씩 늦었었는데 올해 고추심기는 내가 첫째로구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